[권혁승 칼럼] 기브온 거민의 생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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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연구(14)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여리고와 아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전 소식은 급속히 가나안 전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요단강 서편지역의 산지와 평지와 해변지역의 가나안 왕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이스라엘의 위협을 대처하게 된다(수 9:1-2).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여호수아 10장은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 왕들을 정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11장은 북쪽 지역의 가나안 왕들과 정복전쟁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가나안 정복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가 소개된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느낀 기브온 거민들이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는 내용이다. 다른 가나안 왕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이스라엘의 공격을 대비한 것과는 달리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조건 손을 들고 투항한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전략을 세워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들 기브온 거민들은 여리고성의 라합 가족과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되었다.

여리고성의 라합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브온 거민들이 보여준 그들의 생존 전략에는 나름대로 신앙적 교훈이 담겨있다. 무엇보다도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회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는 하나님 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필연적 사건임을 주목하였다(수 9:9-10).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린 지침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모두 전멸을 시켜야 했지만, 가나안 땅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화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신 20:10-11). 그런 틈새를 노렸던 기브온 거민들은 길갈 진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사절단을 보내면서 그들이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 것처럼 위장하였다. 위장 방법은 말라서 곰팡이가 난 빵과 포도주가 담긴 찢어진 가죽부대를 가져갔고, 낡은 옷과 낚은 신을 신었다. 그런 모습은 먼 지방에서 온 것처럼 속이는 것도 있었겠지만, 여행에 지친 모습 자체가 처량하고 측은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기브온 거민들은 살아남아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이 되었다(수 9:27).

멸망의 위기 앞에서 종족의 생존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였던 기브온 거민들에게서 돋보이는 점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들의 역사인식이다. 출애굽 사건을 비롯하여 요단 동편의 아모리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필연에 속하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비록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인 것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우리가 본받을 점이다. 예레미야의 거짓 선지자들과의 싸움 역시 하나님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을 예고하면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였다. 그에 비하여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다의 멸망보다 예루살렘의 견고함을 강조하는 편이 훨씬 더 애국자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역사는 낭만적인 미래 청사진만으로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브온 거민들이 바라본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그런 성격에 속하는 하나님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옳지 못한 청지기(눅 16:1-13)와 닮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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