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4] 행위를 공로 아닌 은혜로
지난 시간에 행위와 공로가 얼마나 분리하기 힘든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행위 없는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정의 없는 법도 실현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이 존재하니까요. 혹은 의무 없는 윤리도 실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 윤리가 존재하니까요. 윤리란 일종의 의무 규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시 행위와 공로의 문제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자녀들조차 어렵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을 보십시오. 나라를 팔아먹고도 나중에 정치에 입문하여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고 훈장까지 받지요. 조사해 보면 아시겠지만, 독립운동가들보다 친일파들이 국가로부터 훈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행위에 공로가 돌아갔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다 압니다. 올바른 행위를 한 사람에게 당연히 그 공로가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행위와 공로는 분리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역사가가 하는 작업 역시,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평가하여 행위와 공로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재평가하는 이유도 행위와 공로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리 불가능한 행위와 공로를 분리할 수 있는 걸까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공로를 인정해주는 자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로를 '인정받는 자' 편에서 행위와 공로를 분리합니다. 지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만, 바로 이것이 겸손의 운동이요,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노력은 해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군대생활했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대민지원을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보통 대민지원이란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복구를 위해 민간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때 대민지원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대민지원이라고 말은 했지만, 선임하사의 고추밭에 가서 고추밭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지요.
불만은 많이 있었지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곧 점심 때가 돼서 밥을 먹어야 했지요. 고추밭 옆에는 선임하사의 집이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선임하사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 줄 알았는데, 선임하사의 부인은 밥상을 차려 바로 집 밖에 내놓고 밥을 먹으라고 말하곤 문을 탕 닫고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다 어이가 없었지요.
이런 대민지원도 이상했지만, 일에 대한 어떤 대가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사회에서 일을 했다면 일당을 받고도 이런 '허접한 대접'을 받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필 군인이란 이유로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지요! 그 당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선임하사를 다 비난했습니다.
왜 우리가 선임하사를 비난한 걸까요? 행위에 대한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점심만 제대로 얻어먹었어도 불만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네 종이냐?" 종처럼 대우받는 것이 싫었던 겁니다.
그러나 복음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7장입니다. 만약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오면, 고생했다고 토닥거리며 와서 같이 밥 먹자고 말할 주인이 있냐는 겁니다.(7절) 오히려 종은 죽도록 일하고 돌아와서 다시 주인이 밥을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 후, 주인의 상을 다 치우고 자신의 밥상을 차려놓고 먹는다는 겁니다(8절).
이 복음의 이야기에 의하면, 저는 오히려 선임하사에게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이지요. 복음은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명한 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너에게 감사하겠느냐(9절)?"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절)."
복음에 나오는 종의 자세를 보십시오! 자신의 한 행위에 대하여 어떤 공로를 주장하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일하고 돌아와 주인의 밥상까지 차려주고 설거지를 다하고 주인과 밥을 같이 먹기는커녕, 저 귀퉁이로 돌아가서 혼자 밥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주여,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주인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선임하사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이 우리가 행한 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위와 공로를 철저하게 분리키시고 행위를 공로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포함시키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행위와 관련된 곳에서는 공로를 원하든가, 믿음과 은혜를 강조되어야 할 때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원하는 경향이 있다."
행위가 이토록 공로와 분리 불가능한 관계였기 때문에 행위를 말하려는 자는 언제나 '이단'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던 겁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독교에서 행위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행위를 강조하면서도 행위가 공로가 되지 않도록,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행위가 은혜로 간직될 수 있도록 은혜에 포함시키는 운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로를 인정받은 자가 자신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겁니다. 오직 이 때만이 행위는 은혜로 남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저의 공로를 인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와, 행위와 공로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정립할 수 있다니! 대단하십니다."
만약 제게 이런 칭찬을 했다면, 저는 바로 이 행위를 공로가 아닌 은혜로 간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저는 주의 종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