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10] “이 말씀이 말하는 것은 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거울을 관찰하지 말고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요구조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끊임없이 "이것은 나다, 나에게 한 말씀이다"라고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운동을 하십시오.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잘 설명하는 신학교수나 목사에게 열광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교양으로 생각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인 것, 비인격적인 관계로 바꾸는데 얼마나 진지했습니까!
그러나 자연 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얼마나 소외되고 있습니까! 그러니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데에 진지해 지십시오. 이 진지함을 객관적인 말씀 연구의 진지함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옛날에 다윗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봅니다. 왕은 한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게 하였고, 그의 충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결국 이 여인을 데려와 동침하는 죄를 저질렀고 결국 이 여인은 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때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의 충신이었던 우리아는 전쟁 중 복귀했고, 다윗 왕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들통날까 불안했지요. 그는 자신의 똑똑한 머리를 죄를 가리우는 데에 사용합니다.
"전쟁 중에 고생했는데, 그만 집으로 가서 쉬라."
"왕이시여, 때가 전쟁 중이고 부하들이 아직도 바깥들에 진을 치고 있거늘, 제가 어떻게 처와 같이 잠을 잘 수 있습니까?"
다윗은 마침내 끔찍한 계획을 세우지요.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충신 우리아는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교묘하게 우리아를 죽입니다. 전쟁 중에 우리아만 남겨 놓고 군대가 후퇴했죠. 결국 그는 전사했습니다. 왕은 말합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오."
이 충신은 이토록 위험한 임무를 너무 성급하게 맡았기에 죽은 것으로 백성들 모두는 생각했을 겁니다. 이제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합법적으로 차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방해될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용사의 과부와 왕이 결혼한다는 것은, 전체 군대에 열정을 일깨우게 하는 숭고하고 너그럽고 진심어린, 아마도 왕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아마 백성들은 이런 왕을 더욱 존경했을 것입니다. 충신의 과부까지도 책임짐으로 그의 가문을 예우했기 때문이지요.
그때 어느 날 한 예언자가 다윗 왕을 찾아옵니다. 이 상황을 조금 현대적으로 각색해 보겠습니다. 예언자는 시를 한 수 읊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어떤 왕입니까? 전 세계에서 유일한 시인이자 왕입니다. 그는 많은 시를 썼고 시의 전문가이기도 하지요. 그런 왕 앞에서 시를 한 수 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시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떤 도시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자였고 크고 작은 가축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그의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에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의 딸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인이 부자에게 왔을 때,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습니다."
시의 전문가였던 다윗 왕은 객관적으로 이 시의 내용을 분석합니다. 둘 다 교양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시의 구조, 표현의 선택, 해설의 형태, 시적 언어의 어조와 문체, 교훈점 등을 예언자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지요.
"내가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자는 마땅히 죽을 자라."
필자는 다윗이 신중하게 이 예언자의 시를 평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비인격적으로, 객관적으로 이 시가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아마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문장을 선택하여 제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시의 전문가였으니까요. 예언자의 능수능란한 솜씨에 감탄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다윗 왕은 오늘 날 많은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설교를 비판했던 방식으로 의견을 표현했던 겁니다. 물론, 그 설교 역시 객관적으로 말씀을 분석했지만요.
그때, 예언자가 다윗 왕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예언자가 말한 것은 단순한 이야기요, 시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의 이행입니다.
독자, 당신은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다윗 왕이 남편을 살해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다윗 왕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가 객관적으로 이 시를 분석하고 평가할 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회개에 이르기라도 했나요? 그러나, 그러나, 밖으로부터 오는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다"라고 말할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당신은 객관적으로 말씀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안 되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교리, 이야기, 학문적 연구와 같은 모든 것들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조차도 그런 끔직한 범죄를 저지른 것과 관련하여 이미 충분히 객관적이었습니다!
그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우리아를 죽이는 데 아무런 양심도 발견하지 못했고, 밧세바와 결혼할 때조차 아무런 양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끔찍한 범죄가 발생한 후에도, 그는 비인격성(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잘 살 수 있었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척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비인격성과 객관성이 문화가 되고 교양이 되고, 진지함이 되어 극찬을 받고 있지만, 예언자가 이런 교양과 진지함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그의 권위를 이용하여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할 때까지,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할 수 있었고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당신은, 기독교 세계에서 교활함과 간계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 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이용하여, 사람의 "나"와 사람의 인격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항상 이기적으로 주장합니다. 또한 이를 이용하여 명확히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진지함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지함과 진지함의 분투로부터 면제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진지하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존경받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 이 교활함의 깊이여! 당신이 들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인 반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인격적인 것, 객관적인 것, 교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은 비인격적으로(객관적으로) 이런 비인격적인 것과 관계합니다. 세상 문화의 정점에, 교양 있는 대중들의 선두에, 학문적 연구가 있고 사람들은 반항적으로 이것이 진지함이며 문화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가능하다면 우리는 저 불쌍한 인격적인(주관적인) 사람들을 구석으로 몰아버립니다!
오, 이 교활함의 깊이여!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비인격성(객관성)을 주장하기는 너무 쉽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선천적 재능이며, 원죄에 의해 우리가 공짜로 획득한 것입니다. 이 찬양 받고 있는 비인격성(객관성)은 다름 아닌 양심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심의 부족이 범죄의 행위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멍청하고,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것 정도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양심의 부족은 어느 정도 절제로 나타납니다. 그때 그것은 또한 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취미와 문화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양심의 부족을 진지함과 문화로 바꾸어 놓은 것은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거울 속에 있는 당신 자신을 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면, 말씀을 읽는 동안 당신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음을 말해야 합니다.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나이다. 말씀은 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