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정치권의 ‘희년’ 주장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의 '지대(Economic Rent)' 사상과 성서의 희년(Jubilee) 사상이 마치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신학적 공조를 마다 않는 사회주의 기독교인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들이 토지국유화 정책을 꾀하는 사회주의 정치인들과 연대하는 문제에 관해 몇 차례 기고를 해 왔는데, 이 글에는 그 연대의 중심축이 되고 있는 헨리 조지(Henry George)와 그가 집필한 「진보와 빈곤」에 대한 심층적 비평을 담았다.
1. 헨리 조지의 생애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하급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인쇄업으로 직업을 바꾸지만,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헨리 조지가 받은 교육은 14세까지 받은 것이 전부였다.
어린 나이부터 상점 점원, 인쇄소 사환, 증기선 선원, 금광의 광부 등 열악한 노동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했지만, 결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이 시대의 젊은이처럼?). 직장이 변변치 않은 헨리에게 딸을 허락하는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진 내 돈 전부야. 나와 결혼해 줄래?" 라며 동전 한 닢을 내보인 청혼에,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따라 나선 애니 덕택이었다.
고단한 노동일을 전전하던 헨리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은 역시 인쇄와 관련된 일에서였다. 처음에는 식자 인쇄공(금속 철자를 조판에 맞추는 직업)으로 시작했지만, 글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헨리는 이내 식자공 일에서 편집 업무로, 편집 일에서 글 쓰는 저널리스트로 저변을 넓혀갔다. 그러면서 쌓인 민주당 쪽 인사와의 교분으로, 정치인 보좌관을 거쳐 나중에는 뉴욕시장으로 출마하기에 이른다.
후일 대통령에 당선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이 선거에서 3위를 할 때 헨리가 약 1만 표 차로 2위를 했을 정도로 기염을 토한 것은, 민주당과 노동조합의 지원 덕분이다. 그럼에도 경제적 여건은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러다 정치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것은, 그동안 구상만 하고 미뤄오던 일생일대의 역작 「진보와 빈곤」을 위한 본격 집필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약 1년 반 만에 탈고 했다.
2.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테제의 중심은 이것이다.
"대체 왜 세상은 진보하는데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실 이 문제는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였지만, 그 '누구나'는 그동안 그것이 그러하다고만 여기며 일종의 자연법칙으로만 수용했지, 그 구조적 문제를 굳이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종교조차 그것은 신의 섭리로 설명할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그런 터부(taboo)로 여길 때, 그가 이 책에 남긴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즐겨 인용하는 말로, 다음과 같다.
"빈곤에서 생기는 고통과 야만성을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섭리로 돌린다거나, 두 손을 모으고 만물의 아버지(All-Father) 앞에서 대도시의 궁핍과 범죄의 책임을 그에게 미룬다면, 형식상으로는 기도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신성모독이다."
이 말을 즐겨 인용하는 정치인, 그리고 일부 기독교 좌파는 토지 국유화에만 매립된 현상을 보이지만, 사실 토지 국유화는 그가 도출한 이론의 결과이지 핵심이 아니다. 그의 이론 중 핵심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의 사회주의자, 즉 대체로 공산주의 사상과 다르지 않은 이념을 추종하지만 대놓고 공산주의를 선전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이 헨리 조지라는 독특한 인물과 그의 사상은 더할 나위 없는 대안으로 오·남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의 중심 맥락은 간단히 말해, 생산의 3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에 '엄정한' 그리고 '균등한' 평등을 부여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통상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토지와 노동을 구매하여 생산을 일으키는 주체로 통용되기 마련이지만, 헨리 조지는 이를 거부한다. 토지를 중심으로 자본과 노동은 대등한 주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은 노동 스스로 임금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노동은 (자기) 임금을 타고 난다'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자)의 임금을 지불하고 그 노동을 구입하는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가령 토지, 노동, 자본이 생산물을 생산했을 때 그 생산품의 주인은 자본만이 아니며, 분명 노동의 지분이 선투입되어 있다는 논리다. 자본이 선재해 있다는 것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개념이다.
이 명제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선동적인가는 자신이 뭔가 창업을 했을 때,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고용했을 때만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퇴직금 1억을 투자해 토지를 구입하고 노동자를 구인하여 통닭 튀김을 생산했다 치자. 그 노동자가 생산된 통닭 튀김들의 (선재적)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3. 개미의 탑
그럼에도 헨리 조지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사회주의자와는 달리 견실하고 건강하며 빈곤 소멸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이론가였다. 헨리 조지에게 있어 토지, 노동, 자본은 분명 엄정한 독자 요소인데 자본이 홀로 토지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본이 궁극적으로는 지대(땅 임대료)를 추구하고 더 나아가 경제 자체가 그렇게 귀결되고 마는 구조는 오늘날도 부인할 수 없는 악성 자본의 참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분명한 신관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에는 실제로 도처에 그의 신앙관, 특히 하나님과 인간과 땅의 관계에 대한 어떤 신학자 못지 않은 이해가 담겨 있다. 특히 앞서 발췌한 "빈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다..."라는 문장 바로 뒤에는, 교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신랄한 매질을 담고 있다.
"(빈곤을 섭리로 돌리는 것은) 영원한 존재를 폄훼하는 행위이다. 정의로우신 분을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기보다, 차라리 세속의 지배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개미의 탑과 같은 교회를 발로 차버릴 것이다. 우리 문명 속에 곪고 있는 악과 비참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돼지가 먹이를 향해 돌진하듯이 우리는 서로 찢고 뜯고 하면서 이 선물을 진창 속에서 밟고 말았다!"
개미의 탑..., 이 결론부에 다다를 때 교회를 가운데 놓고 아등바등대고 있는 나는 마치 개미의 탑에 갇힌 존재인 것만 같아 마음에 격랑이 인다. 헨리 조지가 던지는 저 화두는 100년 전 음성이지만, 분명 우리 사회, 특히나 우리 기독교 사회/교회에 던지는 불칼임에 틀림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찾아와 이르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ㅡ하고 물었던 상황 만큼이나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교회라는 공유지에는 토지를 소유한 자본(교회 자신이 그런 자본 노릇을 하기도 한다)과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노동이 함께 모여 지낸다. 바리새인, 헤롯 당원, 그리고 젤롯들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겪은 현장처럼, 교회라는 현장은 현실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보다는 토지, 노동, 자본, 셋 가운데 끼어 있는 셈이다. 바로 그때 주님이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말은 뜬금없게도 '형상'(εἰκὼν)을 추인한다. 이 답의 핵심은 세금이 아닌 형상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난해 구절 중 하나로 일컬어지지만, 이 형상론은 구약의 특정한 상황을 추인한다. 바로 출애굽기 33장의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을 때,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알현하는 장면에서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 상을 보여준 일은, 예수께 헤롯당원과 젤롯들이 함께 있는 곳에서 곤혹스런 질문을 했을 때 (동전의) 형상을 가져오라 했던 일에 상응한다. 당원들과 젤롯들 역시 뭔가를 보여달라고 보채기 때문이다(마 22:16, 17).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 민중들이 보챘던 것처럼.
4. 가이사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모세는 어찌하여 하나님의 에이콘(εἰκὼν)을 구했는가? 그것은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일, 곧 황금 송아지 예배로 무려 3천명을 도륙한 슬픔을 안고 알현하는 대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출 32장).
누가 형상을 구하는가? 대개는 황금과 권력을 거머쥔 자가 형상을 구한다. 그 형상의 종결지점은 자기의 형상이며, 그 형상의 총화가 바로 주조(동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분명 주조에 자기 상을 새기는 악성 자본과 그 상을 깨뜨리려는 반(反) 자본 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바위 틈바구니에 끼어 하나님의 형상을 구한 것처럼.)
본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에서 "바치라"는 말은 과한 의역이다. "바치라"로 번역된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는 "갚으라"고 해야 정확한 뜻이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고 했을 때 이 말이 사용됐다. 즉 카이사르조차도 "갚음"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앙갚음으로서의 '갚음'이 아니라 조세(관련 리바이어던) 역시 이 땅에서의 분명한 채무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토지, 노동, 자본에 속하지 않은 어떤 한 차원 높은 응답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죽기 때문에 하나님은 손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 생명을 보호했고, 예수는 자신의 생명으로 그 카이사르의 상응된 하나님의 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5. 섭리
"빈곤을 섭리로 돌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빈곤은 우리가 제거해야 할 악이다"라는 헨리 조지의 말은 참으로 우리의 피를 이글거리게 하는 명문임에 틀림없지만, 개미 탑에서 아등바등 하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만약 빈곤이 없다면, 만약 이 세상에 빈곤이 없어 모두가 평등해진다면, 그러면 승승장구하는 악덕한 부자들이(그것은 아마도 헨리 조지가 말했던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일 것이다) 떨어질 현세의 지옥이 없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만약 빈곤이 사라진다면, 만약 이 세상 빈곤이 모두 사라져 모두가 평등해진다면, 그 악덕의 부자들이 마치 모든 것을 잘 한 것처럼 승승장구하며 살아나갈 때 전혀 어떠한 두려움과 떨림도 없지 않겠는가? 빈곤이 곁에 존재할 때, 악덕의 부요는 스스로가 위협을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바로 섭리라 부른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ㅡ"인 것이다. 이것이 빈곤의 권능이다. 자고로 알리기에 단테는 이 섭리의 현장을 푸르가토리오, 즉 연옥이라 칭했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지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위대한 인물이다. 「진보와 빈곤」 또한 위대한 역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기 스스로가 사회주의/공산주의인 줄 모르고 죽었을 법하다. 하나님의 섭리를 압도하려 할 때, 그것은 선의였을지라도 만물 아버지(All-Father)의 내재된 신성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으로 전락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그의 유물론적 신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필치를 뉴욕시장 선거에서 떨어진 후 행했던 한 연설 가운데서 찾을 수 있었다. 이 본문은 아마도 「진보와 빈곤」 에서 추린 초안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빈곤 해소를 위해 전능자에게 기도한다.
그러나 빈곤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장 나쁜 종류의 신성 모독이다).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전능자께서 기도를 들었다면, 그분의 율법이 그대로 있는 한 그분은 그 요청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부를 생산해야 할 사람이 이용할 원료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분이 지금 우리에게 충분한 것을 주지 않으신 건가? 그분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지라도, 어떻게 그분이 빈곤을 덜어 주실 수 있겠는가?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분은 태양의 힘을 더 키우시겠는가? 아니면 토양에 미덕을 내리시겠는가?
그분이 식물을 더 풍성해지도록 만드시거나, 동물들을 그 본성에 따라 더 풍부해지도록 생산할 것이라 가정 해보라.
그러면 누가 그 이익을 얻겠는가?
대부분의 문명화된 국가에서처럼 토지가 완전히 독점이 되는 국가를 택해보라.
누가 그 이익을 얻겠는가?
토지 소유권자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하늘에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려 보내실지라도
누가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
Men pray to the Almighty to relieve poverty. But poverty comesnot from God's laws-it is blasphemy of the worst kind to say that; it comes from man's injustice to hisfellows. Supposing the Almighty were to hear the prayer, how could He carry out the request so long as Hislaws are what they are?
He merely gives us the rawmaterial, which must be utilised by man to produce wealth.
Does He not give us enough of that now? Howcould He relieve poverty even if He were to give us more?
Supposing in answer to these prayers He were toincrease the power of the sun; or the virtue of the soil?
Supposing He were to make plants more prolific, or animals to produce after their kind more abundantly?
Who would get the benefit of it? Take a country where land is completely monopolised, as it is in most of the civilised countries-who would get the benefit of it?
Simply the landowners. And even if God in answer to prayer were to send down out of the heavens thosethings that men require, who would get the benef it?
(...)
The Crime of Poverty
by Henry George
April 1, 1885.
에필로그
「진보와 빈곤」이 처음 나왔을 때, 모든 고차적 사상의 저작물이 나오면 대개가 그렇듯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 두꺼운 책을 누가 사 보겠는가.) 그러다 이 책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약 1천권을 자비로 구입해서 영미 전역 도서관에 넣어준 프란시스 쇼(Francis G. Shaw) 라는 독지가 덕택이다.
헨리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이 사람은 심지어 죽기 직전 헨리 앞으로 무려 1천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것은 칼 맑스의 경우도 비슷한데, 평소 후원자 노릇을 하던 친구 엥겔스가 막판에 가서는 칼 맑스가 남은 여생 먹고 살 수 있는 유산을 자기 회사에서 빼다 줬기 때문이다. 자본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토지국유화 정책을 선호하는 국내 어떤 정당의 대표가 헨리 조지의 유토피아가 바로 중국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진보와 빈곤」을 읽었다면 결코 나올 수가 없는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cf. 마 22:15-22 (cf. 출 33:12~23)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자본적 교회(대장간)>,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