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11] 말씀의 검, 올바로 활용하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히 4:12).
말씀은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장 비극적인 현실은, 이 말씀의 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 진지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에 진지해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말씀을 비극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기 쉬운 사람은 설교자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을 향한 수많은 설교들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어도,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데 실패하는 비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무엇보다 설교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 진지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청중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모든 청중에게 자기 고백적인 설교를 한다면, 너무 두렵고 떨린 나머지 어디 설교단에 오르기 쉽겠습니까!
배우는 무대 위에 오르면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야 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자신이 맡은 배역을 수행하면 할수록 배우는 찬사를 받습니다. 우리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맡은 배역을 잘 수행했던 배우들을 언급하며 '신들린 연기'라고 얼마나 찬사를 쏟아내곤 합니까!
그러나 설교자는 배우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반대로 그가 단 위에 설 때, 자신의 모든 속내가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단 위에서 폭로해야 합니다. 말씀의 검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그때 그의 내면의 모습은 모든 청중 앞에 고백돼야 하는, '자기 고백적 설교'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설교자의 공격적인 설교를 듣고 실망했던 성도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설교자의 설교에 의해 상처받았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설교자가 설교자 자신에게 말씀의 검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과 마음을' 찔러 쪼개는 데 말씀의 검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청중의 마음은 말씀으로 변화되기보다 '말씀의 검'으로 난도질당하게 됩니다. 매주 '난도질'이 있고, 영적으로 언제나 상처투성이가 되지요. 요즘 말로 영적 힐링은커녕 더욱 상처만 받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씀을 휘둘러 영혼을 죽이는 데 봉사해야 되겠습니까! 설교자여, 말씀의 검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휘두르십시오!
청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자기 고백적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청중 역시 말씀으로 변화되기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아무리 공격적인 설교를 해도, 그래서 말씀의 검을 청중을 향해 휘둘러도 전혀 상처받지 않을 만큼 두터운 갑옷을 입은 분들이 계시지요. 그런 청중은 영혼의 상처를 받는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변화되기도 어렵지요. 어떤 청중입니까?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객관적으로만 분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설교는 지난 번 것과 비슷해. 아, 그래 지난 번 기독교 방송에서 들었던 설교와 같아. 표절 같아. 아니, 목사님이 설교를 베낄 수 있다니! 이건 아닌 것 같아.
내용은 참 좋아. 표현도 좋았지. 그러나 목소리는 좀 고치는 게 좋겠어. 너무 소리를 지르잖아. 이번에도 또 공격적인 설교를 하고 있군. 상처받는 사람도 있겠는 걸. 그러나 나는 아니야."
설교단에서 "똑바로 사세요! 회개하세요!" 고래 고래 소리 지른다고 회개운동이 일어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는 것, 그래서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 이런 적용은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못할 뿐더러 '영적 살인'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말씀의 활용입니다.
말씀을 활용한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책임과 의무를 면제시켜줄 뿐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모자를 벗어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비판은 아군과 적군을 가릴 뿐입니다. 화해보다는 편 가르기를 더욱 강화시키죠. 게다가, 비판당한 자는 속으로 말합니다. '저 사람, 뭐래? 왜 난리야?'
한 마디로, 비판당한 자에게 그의 말은 마치 그냥 지나가던 '개 짖는 소리'와 같습니다. 오히려 더욱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나설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말씀의 검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라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공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옛날, 위험한 순간에 자결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칼이 있었죠. 마치 그런 은장도처럼, 말씀의 검은 자기 자신에게만 휘두를 수 있는 겁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객관적인 설교를 하더라도, 청중은 말씀을 주관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날이 오기를 상상해 봅니다. 설교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설교단에 오릅니다. 그가 먼저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얼마나 말씀대로 살지 못했는지 속내를 다 고백합니다. 청중 역시 진지하게 말씀을 듣더니 자신에게 적용하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한 말씀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모든 청중이 말씀의 검을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운동에 동참합니다. 드디어 영적 대각성 운동이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씀 앞에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요, 영적 운동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이런 운동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는 설교단에서 말씀 앞에서 얼마나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인지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성도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고백하기 시작했고, 대부흥 운동의 발단이 된 것이지요. 이 부흥운동 역시 성도 각자가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결과 아닐까요?
키에르케고어는 그의 저서 <너 자신을 시험하라!>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두 번째 요구 조건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읽을 때,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이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나다. 나에게 한 말씀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