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12] 말씀이 교리일 뿐이라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 읽기'인지 말씀드렸습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한 가지 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입니다. 그를 다루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보다 더 야비한 사람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 대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한 밤 중에 찾아간 산헤드린 회원이자 유대인 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그가 왜 그런 시간에 갔는지 자주 질문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짓습니다. 그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밤길을 찾아 간다 해도 빛이신 주님께 나올 때는 밤도 대낮처럼 밝다는 것이지요.
시편은 말합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1-12)."
시편 말씀처럼 밤도 대낮같이 밝게 비추시는 그분께 나올 때, 그가 밤에 가는 길을 선택한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왜 밤길을 선택했는지 아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결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도 못했고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렇게 그는 자신을 숨기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길을 선택한 것이고요.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트집 잡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애써 부정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보다 이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엘리트 중에 한 사람이었어.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지. 그래, 그는 지도자로서 위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비겁한 겁쟁이야. 배신도 아주 쉽게 한다구!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 이런 복음이 어떻게 저런 비겁한 지도자를 위해 존재할 수 있겠어! 하지만 나는 지도자가 아니야.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나는 저런 사람일 수 없어."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지도자를 고발하는 것과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설령 지도자 계급에 속해 있더라도,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다뤄야 할 문제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교계 지도자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정치 지도자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와 야합하고 있는 어떤 지도자와 니고데모를 연결시키지도 마십시오. 마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와 정계에서 벌어지는 일로 확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이 사람은 나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내가 니고데모에 대하여 묵상하는 동안, 자신에게 "이 사람은 나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면,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저는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게다가 어두운 밤을 틈타 한 번 더 숨기려 했던 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마치 이 말씀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지도자에게만 선포된 것인 양, 트집과 변명 속에 숨기려 했던 것 또한 바로 저였습니다. 오, 저는 그렇게 음흉하고 비겁한 자였습니다! 저는 차지도 덥지도 않게,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었습니다(계 3:15)."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는 방법입니다. 지금까지 연재하며 드린 말씀은 단지 몇 가지 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면, 니고데모보다 얼마나 더 비겁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숨긴 겁니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워 정령을 불러온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지만, 요즘의 우리는, 미신 믿는 자들이 주문을 대하는 것만큼의 정도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비슷한 방식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씀을 읽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이 발가벗겨지고 낱낱이 드러나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이, 마치 접신한 자들처럼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로 변질되는 이 두려운 모순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요구된 것을 실행하는 데에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보는 일, 오직 이 방법으로만 말씀을 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교리일 뿐이라면,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면, 그때 말씀은 거울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교리는 거울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벽 속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객관적인 교리를 통해서는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만 관련시키려 한다면,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볼 수 있는 것은 '주관적인' 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동안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나다. 말씀은 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