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신교 윤리(Protestants’ Ethos)와 자본주의 정신
자본주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성서에 나타난 표본들을 참조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유래가 오래됐지만, 체제로의 실현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최근 자본주의와 배금주의(물질숭배)를 같은 개념으로 오인하게 하는 그릇된 풍토를 조장하고 자본주의의 종식을 표방하는 움직임이 우리 사회, 특히 개신교에 만연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가담하는 개신교 교사들조차 자기 자신 또는 자녀 교육만큼은 자본주의 본산지 미국·유럽을 선호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들은 성서가 마치 사회주의 참고서인 양 가르치면서 유독 원시 기독교의 집단생활 등이 부각된 누가(Luke)의 경제신학에 편중된 경향을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을 알면 그런 가르침은 한낱 사회주의에 대한 열등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란 어떤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윤리(에토스)와 동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대개 누가의 행전에 매몰돼 있는 만큼, 이 글에서는 마태의 경제신학으로 그 편중된 균형을 바로 잡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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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내 돈을 취리하는 자에게 맡겼다가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질책에 담긴 경제관은 분명한 '자본주의'다(마 25:27). '취리하는 자'란 명칭도 은행가(τραπεζίτης)를 이르는 표현이다. 누가는 아예 "은행(τράπεζαν)에 맡겼어야 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눅 19:23).
그러나 여기서의 자본주의란 현대적 의미의 경제자본주의가 아니라 에토스 자체, 즉 윤리 자체를 이르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성서에서 눈에 띄는 자본주의 콘텍스트는 100% 윤리(ethos) 텍스트라 보면 맞다. '자본주의=윤리'였던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이를테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을 때(마 25:29; cf. 눅 19:26), 이 무지막지한 성장위주 자본주의 명제에서 그 무릇 있는 자가 소유한 달란트는 물질이 아니라 사랑과 죄 사함(탕감)의 은유인 까닭이다. 무릇 '돈' 있는 자가 받아 풍족하게 되는 게 아니라, 무릇 '사랑'을 소유한 자가 더욱 사랑에 풍부해지는 원리로 임한다. 상대적으로 사랑과 용서에 인색한 자는 그나마 있던 사랑도 고갈되는 이치이다. 고갈되어가는 그 심신의 상태를 신학용어로 '유기'라 부른다.
이 같은 자본주의 윤리가 담긴 핵심 본문이 바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자 이야기이다(마 25:14-30; cf 눅 19:11-27).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의 기호를 특정할 수 있다. 우선 다섯 달란트는 오경이다. 그리고 두 달란트는 두 계명이다(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는 기독교인(유대인과 구별되는)의 새 계명을 이른다. 한 마디로 재림의 상황인 셈이다.
특히 이 기독교 윤리를 상징하는 한 달란트는 앞서 두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 계명으로 압축했던 시도를 반영한다(마 22장 참조). 하지만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찌된 영문인지 장사를 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만 두었다. 무엇을 묻어 두었는가? 오경에서 한 계명으로 압축된(5-2-1) 이웃 사랑을.
우리는 이 사람에 관해 더 구체적으로 특정지을 수도 있는데, 그는 바로, 앞서 밭에 감춘 보화 비유에서(마 13장 참조) 그 밭에 보화를 감췄던 장본인으로서, 감추고서도 잊어버린 채 땅을 팔아넘긴 바로 그 사람이다.
왜 보화를 땅에 파묻었는가? 그것은 주님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다. 그는 주님을 굳은(엄격한) 사람으로 알고 있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망상 속에서, 하나님도 그러할 것이리라 여기는 이 자는 대체 누구인가. 사회주의자다. 심지는 않고 파묻는 자들....
사회주의 성향의 개신교 교사들이 성서를 경제에 접목시킬 때는 누가의 본문들에 편중시키고 마태의 본문들은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마태복음은 전체가 이 자본주의 에토스로 구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①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의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서 우리의 '죄'를 '빚(채무)'로 바꾸어 표현하는가 하면, ②불의한 청지기의 일방적인 채무(빚=죄) 탕감 행위를 지혜롭다 칭찬하고 있으며, ③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다 하고, 여기 세 사람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④노골적으로 본전과 이자를 은유에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물질에 선행한 영적 흐름의 원리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자본경제원리에 은유된 에토스(윤리)인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이 사회주의/공산주의이며, 여기서 (에토스가 빠진) 부작용을 배금주의라 일컫는다. 자본주의와 배금주의는 동의 개념이 아니다.
현대 사회주의 교사들은 자본주의와 배금주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폐퇴시키려 애쓰지만, 도리어 자본주의와 에토스의 이 같은 상관관계는 사회 구조로의 성립 과정에서부터 발견됐다.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되기까지는 중산계층의 지대한 역량이 체제를 견인하였는데, 그 구체적 토대는 중산층이 지니고 있던 금욕적(근검절약) 직업윤리 의식이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직업윤리의 자극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칼빈의 직업소명 의식을 위시한 총체적 프로테스탄티즘 교의로부터의 공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이론적 명제로 정립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입증한 인물은 막스 베버였다.
참고로 그는 결코 칼빈의 가르침이 자본주의를 주도했노라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연관성에 관한 매우 특이한 관찰과 부연을 덧붙였는데, 자본주의라는 합리적 체제가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비합리적 역동에 의해 주도됐다고 밝힌 대목이다.
그 비합리적인 역동이란, 합리적 생활 태도의 형성을 방해하는 영혼의 걸림돌들을 극복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이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그리고 가톨릭보다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서 더 잘 드러난다는 인과관계였다. 그리하여 지역적으로는 동일한 유럽이면서도 개신교령 국가들이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빨리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통계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인(종교적) 역동이 합리적 체제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특이했던지, 맨체스터 대학에서 목회신학을 가르쳤던 로날드 프레스톤(Ronald H. Preston)은 말하기를 "개신교의 윤리가 자본주의에 끼친 이 역동적 영향은 칼빈 자신도 신기하게 생각했을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란 개신교 윤리의 성과이지, 결코 부패가 아니라는 논증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달란트 받은 자를 질책한 것은 한 달란트 이상을 이익으로 남기지 않아서라기보다, 달란트(사랑, 용서) 유통의 흐름을 경색시키고 정지시킨 잘못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심지 않고 파묻는 사람은 관계를 파묻는 자이거나 사회주의자이거나ㅡ일 것이다.
끝으로 마태뿐 아니라 누가의 경제신학에도 공히 해당되는 몇 가지 복음적 주석을 추가하면, ①신명기 율법에서는 이자를 못 받게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받는 건 허용한다. 즉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해야 할 것 아니냐(마 25:27; 눅 19:23)"는 표현은 달란트(복음)를 이방인에게라도 전파했어야 했다는 선교적 암시.
그리고 ②다음 구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다소 과잉됐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더 좋다. "무릇 소유하고 있는 자(ἔχοντι)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μὴ ἔχοντος)는 그 있는 것까지 가져감을 당하리라(땅에 파킹된 것은 소유가 아니라는)".
(참고할 본문, 마태복음 25:15-30; 누가복음 19:11-27).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