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중간기의 의미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그분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승리하셨어. 그분이 승리하셨으므로 우리의 승리도 명백해. 당연히 우리도 그분의 승리에 동참해야 하고 그분의 승리를 누려야 한다고!"
맞다. 주님은 승리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이와 같은 승리를 이룬 사람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죽음만큼 강한 권력자도 없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죽음을 넘어 선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나 그분은 죽음을 이기셨다. 이렇게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승리를 이룬 분께서 모든 사람들을 이끌겠다고 초청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그분의 승리가 자신의 승리인 것처럼 느낀다. 부활절이면 그분의 승리가 자신의 승리인 것같이 찬양한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마치 친구가 고시에 합격했다 해서 자기가 합격한 것처럼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은 어리석다. 이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주님이 승리했다 해서 우리가 그 승리를 만끽할 수 있는가? 그분이 승리했으니,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언제나 형통할 수 있는가(요3 1:2)?"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을 이끄시겠다고 하는데 잘 되지 않겠어? 믿으라고! 믿지 않으니까 문제라고!" 우리는 설교 강단에서 믿는 자가 잘 되어야 한다는 설교, 형통해야 한다는 설교, 세상에서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설교를 얼마나 들어왔던가.
기독교 밖에 있는 이방인이 기독교의 적이 아니다. 아니, 그들은 우리의 전도 대상자이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기독교의 적은 내부에 있었다. 복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이 아니다. 많이 바꾼 것도 아니다. 99%는 복음이나 1%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 변질은 영원의 차이가 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일반적인 영웅의 역사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링컨 어떤가? 링컨은 대표적으로 민주주의의 아버지나 다름 없다. 그를 토대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링컨의 수혜자들이다. 그가 먼저 민주주의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그를 통해 민주주의는 발전했고 지금 우리는 그 유익을 누리며 살고 있다.
누군가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다 수혜자들이다. 그 사람 때문에 쉬운 길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의 형세가 다 이렇다 보니, 그리스도가 가신 길에도 이런 사고를 적용하려 든다. 그러나 그분이 가신 길은 이런 역사 속 영웅들이 갔던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길을 가셨는지 묵상해 보라. 그분은 승천하셨고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승천과 재림 사이의 이 시기를 '중간기'라고 일컫고 싶다. 중간기의 의미란 무엇일까? 승리를 만끽하라고 준 기간일까? 아니면, 그분께서 하신 사역을 대신 완성하라고 맡기신 시기인가? 그러나 역사의 영웅들 중 다시 올 것이라고 약속했던 자가 있는가? 누가 그의 수혜자들인지, 누가 그에게 빚졌는지 심판하러 온다고 말한 자가 있었는가?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교 훈련>에서 이 시기는 '싸우는 교회, 영적으로 전투하는 교회'만 하나님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교회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거나, 세상과 교회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승리를 누리면 된다는 것이다.
중간기는 그분의 승천과 함께 시작한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이끌겠다!" 말씀하시면서 무엇인가 시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 걸까? 주님은 스스로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진리이신 분이시다. 한 마디로 중간기는 승리를 누리라고 준 시기가 아니라, '시험의 시기'이다.
그분은 길의 모범이시다. 그분의 삶 전체가 길이고, 모범으로서 길을 남기신 분이시다. 따라서 중간기는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고 있는지가 '시험의 내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분은 진리이시다.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서 시험을 치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영원의 보험만 가입하려 든다. 이 세상에 영원을 획득할 수 있는 보장성 보험은 없다. 그러나 교회는 내세 보장성 보험, 영원을 보장할 수 있는 보험을 그것도 공짜로 들어준다. 그동안 이 보험을 들기 위해 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대표적인 싸구려 복음이다.
이들이 저 천국을 사모하면서 내 팽개친 현실의 삶, 그들이 이 현실의 삶에서 기대한 것은 무엇일까?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보험이다. 그들은 답답하고 풀리지 않는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로 '주님'을 찾는다. 그들이 시험을 치러야 할 현실의 삶은 도외시한 채 말이다. 그들이 처한 죄는 하나님이 주신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역시 싸구려 복음이다.
이단들이 말하는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을 보면, 현실의 삶을 무시한 채 종말 신앙만을 강조한다. 곧 세상이 망한다는 것이다. 곧 세상이 망한다는데 누가 현실의 삶을 신경 쓰겠는가. 다 팽개치고 전도하러 다닌다. 차라리 내일 죽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범신론자 스피노자가 더 낫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기성 교회 역시 저 천국의 신앙만을 강조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지옥의 두려움을 자극해 믿음에 이를 수는 없다.
혹은 영성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영성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속의 교회이지 세상 밖의 교회가 아니다. 엘룰이 <도시의 의미>에서 말하듯, 교회는 이 세상에서 '무고한 유형지'가 되어야 한다.
반쪽짜리 복음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나머지 반쪽이 필요하다. 현실의 삶이다. 이 삶이 중간기로 '시험 기간'이 되어야 한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는지 테스트받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말한 이야기가 곧 오늘날 우리에게 한 말씀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는 자니라(고후 13:5)."
시험을 치지 않는 자를 주께서 이끄시겠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버림받는 자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통곡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걷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