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운명
나는 점을 치고 싶지 않다. 미래를 알고 싶지도 않다. 예언의 은사도 싫다. 미래를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고 묻지도 않으리라! 이 길이 얼마나 좁은지 알기 때문이다.
괴물 같은 지식, 난 이것이 싫다! 누군가 예언의 은사가 있는 자에게 찾아가 자신의 끔찍한 죽음을 알게 되었다면, 괴로워서 살 수 있을까? 아, 그러나 주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얼마나 두려운 고난의 무게인가!
세상과 싸우기 위해 두려움도 모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승리할 것을 소망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져 그들의 소망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달라져 파멸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일지라도, 그들은 결국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인간적인 소망이 있기 때문에 버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경건한 소망을 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어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지를. 그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실로 그는 그 운명을 원했고, 기꺼이 그 운명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얼마나 두렵고 소름 끼치는 지식인가!
그가 사역을 시작했던 처음부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했을 때도, 그 순간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저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라!" 소리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도대체 왜 그는 저 사람들과 관계하기를 원하는 거요? 저들은 배신자가 아니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구세주이신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의 행위를 행하신다. 그의 전 생애는 사랑의 행위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저 배신자들을 사랑할 때, 저 같은 순간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의 행위가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자기를 조금만 더 사랑했더라면, 그가 이 사랑의 행위를 멈췄더라면,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나 그때 그는 십자가에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소? 아무리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도 살아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는 분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구세주이신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좁은 길이여! 이 좁은 길, 아무리 작더라도 그를 따르려는 자는 이 길을 통과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능력 주세요. 제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이 되게 해주세요. 주님, 제 뜻대로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 소원만큼은 들어주세요."
사람은 능력을 구한다. 세상에서 능력을 행하여 인정받고 싶어한다.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능력들을 선물로 받는다. 예언의 능력, 통변의 능력, 신유의 능력 등 각종 은사를 다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능력을 받아 사회적으로 큰 기업을 이루기도 하고 큰 성공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영적 은사를 받아 능력을 행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구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는 아이처럼 기뻐했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자만하지도 않았고 겸손히 구했다. 여전히 더 많은 것을 구했고 하나님은 이런 모든 능력을 허락하셨다. 결국 모든 능력이 그를 압도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주님, 이제 됐습니다. 더 이상 주님께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늘의 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오는 것 같다.
"얘야, 이것은 너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단다."
그때, 그는 얼굴이 창백해진다. 부르심을 받는 자, 그는 거의 쓰러지면서 말한다.
"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나의 운명은 정해졌군요. 고난당하고 희생당해야 하는 나의 삶, 내가 이미 다 알아버렸군요!"
얼마나 좁은 길인가!
이 길은 처음부터 좁았다. 그가 처음부터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일이 그를 거역하여 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의 모든 능력을 활용하여 이 길을 통과하도록 허용될 때, 아무도 반대하는 자가 없을 때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자기 자신뿐일 때에도, 이 길은 충분히 좁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저항하며 자신을 파멸에 몰아넣기 위해 모든 능력을 활용해야 하는 것, 이 길은 무한히 좁기에 좁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대신에 이 길은 통과 불가능하고, 막혀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길은 미친 길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길이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이다.
이것이 정확히 이 길이 좁은 방식이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진실한 것, 선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가 모든 힘을 다해 이를 위해 일한다면, 그때 그는 스스로 어떤 파멸을 향해 일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가 전체 진리를 너무 빨리 소개한다면, 그의 파멸은 훨씬 더 빨리 오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거역하여 일하면서, 조금 더 철저하게 파멸을 보장하기 위해 당분간은 착각 속에 빠져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좁은 길인가! 이 길로 걷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즉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전능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것, 말하자면, 전능하신 분이 전능의 능력으로 인간이 되어 오직 자신 스스로를 죽는 데만, 파멸에 이르는 데만 그 힘을 써야 하는 것, 그때 자신을 거역하여 일하기 위해 이런 전 능의 능력을 활용해야 하는 것, 처음부터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 오, 처음부터 얼마나 좁은 길인가!
바로 이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다. 이 길은 마지막까지 점점 더 좁아지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이 길은 점점 더 쉬워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좁다가 조금씩 점점 더 쉬워지는 길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다. 이 길은 인간의 지혜와 상식이 걷는 길이다.
인간의 지혜와 상식이 의지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을지라도,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것이다. 승리의 확신이야말로 인간의 지혜와 상식이 의지하는 곳이다.
반면 마지막까지 좁아지는 길, 이 길은 광기다! 세상에, 어찌 이 길을 간단 말인가! 광기이든 지혜이든, 이 길은 점점 더 좁아진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