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한숨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눅 12:49)!"
이 말씀은 한숨이다, 탄식이다. 이 길은 좁다. 그래서 한숨을 쉰다! 한숨이란 무엇인가? 한숨이란 무언가 내면에 갇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밖으로 나와야 하는 무엇인가 나올 수 없고 나오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 마음에 근심이 있으나 밝힐 수 없을 때, 한숨을 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숨을 쉰다.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 거칠게 숨을 쉬는 것처럼, 그는 이 말은 죽지 않기 위해 마음의 부담을 터는 행위였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
내가 어떻게 이 고난을 서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서술해 볼 것이다. 시도는 해 보겠지만, 이 시도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이 고난과 비교할 때 얼마나 저열한 것인지,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배를 상상해 보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본 배보다 무한히 큰 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큰 배를 상상해 보라. 이 배에는 약 10만 명 정도는 탈 수 있는 큰 배다. 전쟁의 시기였고,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싸움의 목표는 이 배를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배에 불을 당겨야 하는 사령관을 상상해보라! 그가 한 번만 불을 당기면 이 배에 탄 사람은 다 죽는다.
이미 밝힌 것처럼, 이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예이다. 어찌 10만 명과 인류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 모든 사람을 날려버리려는 사령관과 그리스도께서 당겨야 하는 불의 공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불을 당길 때,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이 있을 것이다(눅 12: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이 순간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오, 이 일이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라고 한숨 쉴 때, 이 앞에 있는 순간 역시 끔찍하겠지만, 그 끔찍한 순간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 17:17)."
이것은 한숨이다. 그는 마치 임종 가운데 있는 환자와 같다. 그는 가벼운 병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임종 가운데 있다. 그는 가벼운 질병이 아니었기에 포기했던 것이다. 그는 간신히 베개에서 머리를 들며 묻는다.
"지금 몇 시인가요?"
죽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몇 시인가? 내가 얼마나 참아야 하는가? 그러나 아직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고난당하는 자가 "내가 얼마나 더 이것을 참아야 하는가?"라고 한숨 쉴 때, 이 앞에 있는 순간 역시 끔찍하지만, 그 끔찍한 순간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그때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모인다. 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고대했는지 모른다(눅 22:15). 그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변호도. 그는 어떤 면에서 충분히 화도 내고 자기변호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무한히 존경할 만한 "온유"가 그에게 있었다. 아마 그는 가룟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다.
"저리 가! 이 만찬에 오지 마!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너무 고통스럽구나."
그러나 온유한 그는 유다에게 말한다.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
이것은 한숨이다. 다만 속히 하라! 가장 두려운 것도 이 말보다 더 두렵지 않다. 다만 속히 하라! 깊고 천천히 내쉬는 한숨, 다만 속히 하라! 이것은 마치 누군가 거대한 사명을 수행할 것처럼 보인다. 노력이 그의 능력을 초과했을지라도, 그는 다음 순간을 위해 남겨진 충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한 순간만 늦어도 나는 너무 약해질 수 있어. 그땐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야. 그러나 다만 속히 하라!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
그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그는 기진하여 쓰러진다. 오, 이 일이 속히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마치 죽은 자처럼 쓰러진 것이다.
그는 정말로 겟세마네보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이었을까! 십자가에서의 싸움이 죽음의 싸움이었다면, 기도에서의 싸움은 살기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피 흘리는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땀은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었으니까(눅 22:44).
그때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때 그는 유다에게 입을 맞춘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 그는 체포당하고, 고소당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은 '합법적 과정'이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정의였다!
거기에는 그가 선의를 베푼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 계획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삶과 모든 생각은 허구한 날 이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외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눅 23:21)!"
그 땅에 황제를 두려워하는 지배자가 있었다. 물론 그 지배자는 교양 있는 사람이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손 씻는 의식(마 27:24)"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죄판결을 받는다! 오, 인간의 정의여!
그래, 날씨가 화창할 때, 모든 일들이 부드럽게 진행될 때, 일종의 약간 작은 정의는 실현된다. 그러나 상황이 특별해질 때마다, 오, 인간의 정의여! 오, 인간의 문화여, 너는 네가 가장 증오하는 것, 즉 문화의 부족, 군중의 야비함과는 얼마나 다른가? 너는 군중이 저지른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좋은 방법만을 준수하고 씻지 않는 손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오, 인간의 문화여!
그때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한 번의 한숨이 더 있었고 끝나버리고 만다. 한 번 더 있었던 한숨, 가장 깊고도, 가장 끔찍한 한숨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이 굴욕은 고난의 최후이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순교자들 중에서, 당신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분히 강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이 한숨만은 피해갔다. 그러나 그에게 최후의 순간이 왔다. 그때 그는 정말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정말로!
"그래, 나의 원수들이여, 네가 옳았다. 이제 기뻐하라. 내가 말했던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착각이었을 뿐이다. 이제 모든 것은 명백해졌구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맙소사! 그가, 그가 자신이 아버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1:14)!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10:30)! 그러나 하나였다면,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가 그를 버리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따라서 그가 아버지와 하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 가장 극단적이고 초인간적인 고난이여! 오, 인간의 마음은 조금 더 빨리 터져버렸을텐데. 오직 사람 되신 하나님만이 이 최후의 고난을 통해 모든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때 그는 죽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갔던 길이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 길을 따라갈 것인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