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연구(30)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땅 분배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수아서 13:1-7에 기록되어 있다. 그 명령 속에는 가나안 땅 가운데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는 지역들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앞 장인 12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모세가 점령한 왕들(12:1-6)과 여호수아가 점령한 왕들이 통치하던 지역(12:7-24)과 함께 그때가지 정복하지 않은 지역도 분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강조 속에 담긴 신앙적 교훈은 무엇일까?
땅 분배와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성경에서 나이가 많아졌다는 것은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성경 인물들은 역사의 무대를 떠나면서 마지막 고별사를 여러 형태로 남겼다. 나이 많아 늙게 된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마지막으로 축복을 해주기로 작정했지만, 야곱이 그 축복을 가로채 버렸다(창 27장). 야곱도 나이가 많아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열 두 아들들이 후일에 당할 예언을 축도형식으로 전해주었다(창 49장).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모세의 축복기도 역시 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 놓은 고별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땅 분배와 관련된 내용이 끝나는 여호수아서 23장과 24장에 가서야 그의 마지막 고별 연설이 등장한다. 이것은 땅 분배가 여호수아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과제였으며 그 일을 위하여 그의 지도력이 크게 발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격려의 말씀과 더불어 그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지시하신 것처럼(1:2-9) 땅 분배를 앞둔 시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그가 할 일을 명령하셨다(13:1-7).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땅을 성경에서는 '얻을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야라쉬'인데, 같은 동사가 여호수아서 18:3에서는 '취하다' '정복하다'로 번역되었다. 영어 번역에서는 'possess' 혹은 'inherit'로 번역하고 있는 이 동사는 구약성서 230여회나 사용되는 동사로서 특히 신명기(70여회)와 여호수아서(30여회)에서 그 사용 빈도수가 많은 편이다. 이 동사는 어원적으로 한 가정에 속한 가장권이나 재산에 대한 법적 소유권과 그 소유권의 정당한 이양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에 의한 가나안 땅의 점령은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이양된 소유권을 확보하는 차원에서의 점령이다. 그러한 기본적 의미는 여호수아서 13:6에서 사용된 '야라쉬'의 사역형 동사 '호리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사역형 동사의 의미는 '쫓아내다'인데, 땅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땅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땅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지역은 이스라엘의 남부해안지역이다(13:2-3). 여기에는 블레셋의 다섯 방백의 땅(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과 그술 사람의 지역, 그리고 남방 아위 사람의 땅이 포함된다. 두 번째 지역은 이스라엘의 북부지역으로서(13:5-6), 그발(비블로스)과 헤르몬 산 밑의 바알갓(오늘날의 베카계곡)에서 하맛 어귀에 이르는 지역이 포함된다. 세 번째 지역은 가나안 온 땅과 시돈사람에게 속한 지역이다(13:4). 그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규정하기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같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남부지역과 북부지역 사이의 해안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땅 분배에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은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이라 하여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배해 줄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마쳐지고 있다(13:6-7).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 거민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이미 점령한 땅을 지파별로 공평하게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을 믿음으로 분배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점령한 과거의 일에 매이지 말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향하여 나아갈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에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확신 곧 비전으로 표현되고 있다(히 11:1).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