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간사하지 않았던, 참 이스라엘인
전설에 따르면 나다나엘은 인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선교하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를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승에 기인해 그에 관한 작품은 대부분 참혹한 도상을 띤다.
그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치열한 영성을 간직한 작품은 밀라노 두오모 성당(Duomo di Milano)에 세워진 그의 입상일 것이다. 사도상은 대개 긴 겉옷을 두르고 그 권위와 기품을 드러내지만, 나다나엘이 두르고 있는 것은 그의 벗겨진 살가죽이다.
이 같은 참혹함을 대면할 때 우리는 그 죽음의 잔혹한 방식에만 매몰되어 두려움에 떨기 십상이지만, 실은 나다나엘의 도상에는 성서 컨텍스트(문맥)가 있다. 그 벗겨진 살갗과 직결된 기호가 있는 것이다. 바로 '간사함'이다. 돌로스 우크(δόλος οὐκ), 즉 나다나엘에게는 '간사함이 없다'는 대목이다(요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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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은 열두 제자 중에 복음서를 통틀어 3회밖에 나오지 않는 제자 바돌로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열두 명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없던 그가 대체 왜 요한복음에서만은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7회나 수록되었는지, 그의 이름 '나다나엘'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부정적 성향의 인물인 것처럼 등장한다. 단짝 친구인 빌립이(둘은 꼭 '빌립과 바돌로매'로 표기되어 있다) 나사렛에서 선지자를 만났다고 증언했을 때, 일언지하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빌립이 증언하기 전부터 예수라는 인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나사렛 예수가 바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선지자라..."는 설명을 듣고서 보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 평가는 개인적 성품에서라기보다는 '나사렛 전승'에 대한 전면적 거부·부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이다. 나다나엘의 선입견은 한마디로 민족적인 메시야 운동에 대한 평가절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은 역사적으로 두 단계에 걸친 강도 높은 헬라화(Hellenizing)를 당하였는데, 첫 번째는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들에 의하여, 두 번째는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는 대단히 혹독한 과정이었지만, 두 단계 중 인기 정치를 구사했던 헤롯 가문이 주도한 헬라화은 전자보다 더욱 혹독했다.
이에 대한 반응도 두 갈래로 갈렸다. 하나는 적극적인 헬라화 곧 세계화를 수용하는 진영, 다른 하나는 세계화를 전면 거부하는 진영이었다. 후자는 철저한 민족주의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은 언제나 예언자의 예언 전통을 활용한 메시야 운동(Messianic Movement) 아류 집단의 난립으로 나타났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며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여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는 가말리엘의 소견은 바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나다나엘의 냉소의 다른 버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운동(Jesus Movement)'도 난립한 메시야 운동의 한 아류로 비쳤다는 사실의 방증인 셈이다.
그런데 이 부정적 선입견으로 가득했던 나다나엘의 반응에 변화가 일어났다. 짤막한 다이얼로그 끝에 일어난 변화이기에 그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지, 특히 동시대 수많은 메시야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그가 유독 예수를 '임금님'으로 알아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무척 난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전승'을 부정한 것이라 일렀는데, 나사렛 전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피면 두 사람이 교감한 내용에 한층 더 근접해 다가갈 수 있다. 나사렛 전승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일컫는다. 이 예언 중에 '가지'를 뜻하는 네쩨르(נֵצֶר)를 바로 '나자렛'(Ναζαρὲτ)으로 보는 전승인 것이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대체 왜 '나자렛 전승'을 부정한 것일까? 그것은 앞서 가말리엘의 소견에 표명이 되었다시피, '왕의 제도'란 본래 열광적 분위기로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뽑아 달라 아우성치다가는 이내 자신들 기준에 미달할 시 가차 없이 끌어내리되, 끌어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벗기고 매질하고 죽이는 야만성에 기초한 제도인 까닭이었다.
이스라엘에 왕의 제도를 도입한 사무엘에게 이 제도에 대한 경고를 하달한 것은 그 문맥으로 비추어 볼 때, 제도의 위험성 자체보다는 민중의 우민성을 드러내 고발하는 맥락이었다.
이와 같은 왕의 제도를 부정하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인(ἀληθῶς Ἰσραηλείτης)'이라는 찬사를 보낸 이유는 절대 다수가 추종하는 민족주의, 아니 민족주의를 프로파간다로 삼는 우민정치(ὀχλοκρατία)를 배격한 나다나엘의 소신이 실로 "간사하지 않게" 비쳤던 까닭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이름을 바돌로매가 아닌 나다나엘로 기억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은 마치 맹인 디매오의 아들을 '바디매오'로 표기한 것처럼 탈마이(תַּלְמָי)의 아들(בַּר)을 바돌로매(Βαρθολομαῖος)로 부른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명이 아닐 수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무명 제자의 이름은 전혀 다르게 기억되었다.
우민적 민족주의에 맹목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군왕적(Βασιλεία) 다윗 전승을 향해 평가절하를 서슴지 않는 그의 기품을 통해, 그의 이름은 다윗에게 부정적 예언을 서슴지 않았던 '나단'의 이름으로 더 기억된 것이다. 나다나엘(Ναθαναήλ)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나단'(נְתַנְאֵל)에 대한 회상이 아니면 결코 일곱 회씩이나 강조할 이유가 없는 이름이다.
이와 같은 바돌로매 전승에 입각하여, 바돌로매라는 인물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참) 이스라엘인'의 표상이 되었다.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이 성찰이야말로, 그의 순교사화(피부가 벗겨져 죽임당한 전설)를 압도하는 그의 이름의 진정한 기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훗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시점에 이르러 민중(民衆)은 실제로 나다나엘의 예견 그대로 반응했는데, 형틀 팻말에 '유대인의 왕'이라 쓰는 것도 아까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쳐 적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팻말에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을 기재함으로써, 민중 스스로가 '나쩨르(나자렛) 전승'을 파기했음을 그들의 간사함(δόλος)으로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박피(剝皮, flaying), 곧 벗겨진 살가죽은 순교한 나다나엘에게 지조의 상징이 되었지만, 간사한 자들에게는 추호의 거리낌 없이 뒤집어쓰는 그 인두겁의 상징이 되었다.
(cf. 요한복음 1장. 사무엘상 3장.)
에필로그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 세워진 저 'Marco d'Agrate' 작품이 만들어지기 20-30년 전,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최후의 심판'에도 나다나엘이 나온다. 정중앙에서 최후의 심판자로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좌편 하단에서 자신의 살 껍질을 들고서 항변이라도 하는 듯한 인물이 바로 그다.
미켈란젤로는 이 '최후의 심판' 장면 중에서 저 나다나엘의 살 껍질 얼굴 부분에다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한 쪽 손엔 아예 나이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가 자기 가죽을 벗긴 듯하다.
개인의 영으로나 집단의 영으로나, 우리 역시 필연적인 저 자리에 서고 말 것이다. 우리 자신의 박피는 지조일지 인두겁일지, 미켈란젤로의 나다나엘 역시 저 돌로스(δόλος)에 대한 표지로서 결코 무관치 않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