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상이몽’
우리는 지금까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가신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제자들은 주님과 같은 길을 함께 걸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까.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주님을 따른 걸까? 같은 길을 걸었을지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동상이몽'이었을 뿐이었으니까.
제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에 올랐을까? 그들은 여행을 떠날 때, 부푼 꿈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희망이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 모두는 그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갈망이 있었다. 이미 유대 나라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헤롯 가문의 통치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헤롯 역시 유대인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고 백성들을 학대했으니 백성들은 얼마나 메시아를 고대했을까? 그 당시에 자칭 메시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주님을 만났다.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찾으러 다녔다. 그 분이 갈릴리 사역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많은 기적을 경험했다. 그분의 기적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날로 커져만 갔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주님께서 충분히 왕이 되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요 6:15).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마다 그분은 도망치셨고 성공이 그분을 부를 때면, 실패의 도움으로 성공을 물리치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첫날,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그분을 환영했는가? 그분을 노래하며 그분을 왕으로 모실 준비를 완전히 끝내놓았던 것 같았다. 그때, 그 군중의 환영소리를 가장 기뻐하고 마음에 흥분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누구였을까? 바로 제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일이 실패하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죽을 것이라고 세 번이나 언급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주님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묻기도 두려워했다(막 9:32). 이는 이 일이 성공하기 원했고, 정말로 주님이 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분은 왕이 되셔야 한다. 그 동안 제자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공, 출세다! 예수님은 '왕'이 되신다! 왕이 되셔야 한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로마의 압제와 헤롯 가문의 불의를 막아야 한다!
명분도 좋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아마도 이것이 그 당시 군중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왕이 되시기를 고대했던 자들은 제자들이었다. 그 중에 가장 높은 자리를 탐냈던 자가 베드로였을 것이다.
베드로 역시 이 복음을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해'라고 말할 수나 있을까?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이해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 그가 그것을 자랑삼아 말할 때, 주님은 경계의 표시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막 10:31)'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조차도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제자들은 주님을 이용하려 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분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거기에는 인간적인 성공이라는 기대감이 항상 그들 안에 있었다. 특히 베드로는 첫 번째 자리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수제자라는 인식이 있었고 제자들 중에서도 우두머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생각을 다 뒤집어엎은 분이 주님이시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성공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죽으러 가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이 여행은 동상이몽이었던 것이다. 같은 길을 걸었지만 다른 길이었다.
우리는 가끔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물질적 축복을 선포하는 것을 듣는다. 예수 믿으면 복이 온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에서 성공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고지론'이다. 여기에 번역 신학도 한몫을 했다.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답지론'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높은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 저 변두리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자리, 아무도 찾지 않는 자리에 가서 남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가? 고지론을 거부하면서 이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예전에 있었던 이런 논쟁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높은 자리에 가든 낮은 자리에 가든, 예수님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제자들처럼 동상이몽을 꿈꾸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처럼 높은 자리, 성공의 길만 생각하는 사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낮은 자리에 가서도 유혹은 있다. 낮은 자리에 가서도 명성을 꿈꾼다. 세상에! 그래서 낮은 자리에 갔는데도 아무도 관심이 없으면 실망하고 그 마음이 병든다. 낮은 자리에 가서도 누가 좀 이런 나를 알아줬으면 한다.
"바보 같은 제자들! 어떻게 저들은 주님을 이용만 하려 할까? 그들은 출세에 미쳤구나!" 우리는 과연 이런 식으로 비난할 수 있는 자들일까? 우리는 높은 자리에 있든 낮은 자리에 있든 그분을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베드로는 주님께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마 19:27)?"
우리는 속으로 베드로처럼 말한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러면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 주님은 자기 자신을 거저 내어 주셨건만, 우리는 그분과 흥정을 해야만 하는가? 주님을 믿음으로 인해, 꼭 무언가를 얻어야 하는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은 '선물'로 더해 주신다고 주님께서 말하지 않았던가(마 6:33)? 선물을 주는 자보다 선물이 더 중요한가? 그래서 준 자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그러나 스스로를 선물로 내어 준 자, 그래서 준 자와 선물을 분리시킬 수 없는 자를 잊을 수 있는가?
스스로 선물이 되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고지론이든 미답지론이든, 우리도 제자들처럼 동상이몽 중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