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가해자의 기독교, 피해자의 기독교
여검사 성추행 폭로 사건과 관련, 가해자로 지목된 검사가 최근 한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고 간증한 것에 대해 논란이 오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번 사건이 영화 <밀양>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적지 않은 가운데, 이영진 교수의 <밀양> 리뷰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한 줄 평: 유심론과 유물론을 기독교로 오해한 영화
평점: ★★★☆☆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신애(전도연)는 사랑하는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밀양으로 아들과 함께 이사온다. 이사 오면서 만난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이 신애에게 연민을 품고 접근해 오지만 신애는 무감각하기만 하다.
어느 날 신애는 아들마저 잃고 만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교회에 의지하지만 교회의 이중성, 특히 무엇보다 아들의 생명을 앗아간 범인이 개종 후 보이는 의연한 태도에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회의로 결론을 맺는다.
이 영화의 메시지 축은 직접적으로 기독교를 겨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최고의 피상적 가치로 알려진 '용서'와 그에 관한 비판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그 피상성(superficiality)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강조해 온 가해자 중심의 가치보다는 피해자 중심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기독교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이 글은 신애라는 여인이 체험한 기독교(인)의 이중성을 옹호하는 글이 아니라, 신애의 눈을 빌리고 있는 이 영화가 어떻게 기독교를 오해했는지 주된 플롯 순으로 요약한 글이다.
#1. 그녀는 극한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후 용서를 실천한다. 하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식 잃은 사람으로서 그리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녀는 아들 죽인 살인자를 찾아간다. 용서하러.
#2.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주러 왔어요." "나도 전에는 몰랐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안 믿었어요." "안 보이니까 안 믿었죠." "우리 준이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알고 새 생명을 얻었어요." "...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나님 사랑을 전하러 왔어요."
#3. 그녀가 쏟아내는 저 꽃말들은 일종의 준비되고 학습된 '대사'이다. 게다가 자기 아들의 살인자에게 그 꽃말들과 함께 전하기 위해 들꽃까지 꺾어 온 것을 볼 때, 그녀는 반드시 둘 중 하나다. 정말로 그녀가 하나님을 만나 극락에 출입하고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용서란 기독교 내적으로도 그렇게 쉬운 일로 꼽지 않는다.)
#4. 그녀가 감행하는 용서의 목적은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 비현실적인 용서의 언어들과 거기에 더한 들꽃은 그녀가 지닌 철저한 자기애를 반영한다. 우리도 자칫 그런 것처럼. 그 자기애적 이상이 그 대사들을 창조하고 학습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나르시시스트다. 우리 모두처럼.
#5. 그녀의 자기애적 새 삶에 대한 몽환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서 포착된다.
#6. "왜 밀양에 왔는가"라는 물음에, 남편이 당한 불의의 사고를 설명하고는 "죽은 남편의 꿈이었던 밀양으로의 귀향을 통해 새 삶을 일구러 왔노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일찍부터 그 피상성을 눈치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그런 이상을 제공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도와 불륜으로 도리어 그녀의 이상을 파괴한 인물이었다.
#7. 이것이 그녀가 지니고 있는 꿈의 실체인 동시에 그가 구현해내고자 했던 용서의 피상성이다.
#8. 영화의 초반부에 밀양 토박이(송강호)에게 '밀양'의 뜻 말(은밀한 볕)을 일러주면서 "멋있지 않나요~" 하며 나른한 느낌을 만끽하는 표정은 그야말로 나르시시즘의 전형인 것이다.
#9. 그러므로 이후에 벌어지는 그녀의 반신론적 실천들은 살인자의 뻔뻔스런 속죄와 구원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구축하려던 이상적 새 삶의 초석이 되고 있는 그 용서를 선점당해 빼앗긴데 대한 분노와 보복이다.
#10. 따라서 기독교 안팎에서 비판하고 자성했던 저 살인자가 보여준 '용서받은 자로서 초연한 자태'가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불안정한 그녀의 눈에 비친 기독교의 일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녀가 기독교로 귀의하려다가 아예 '유물론'과 교섭을 이루어 급선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살인자가 보여준 확신에 찬 용서는 차라리 '유심론'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갇힌 육체를 통해서 상상하기 가장 쉬운 천국은 육체를 완벽하게 배제한 유심론적 구원 밖에 달리 없지 않았겠는가. 그렇다고 그 유심론적 구원이 기독교인 것은 아니다.
#11. 반면 그 모든 물질적 실체를 부인하는 저 살인자의 유심론적 용서에 맞서기 위해 내밀 수 있는 카드란, 유물론적 용서 밖에 달리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유물론에 천착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독 이 영화의 여주인공 신애는 구토를 많이 한다. 정신이 아닌 물질이라는 것이다.
#12. 그녀는 마지막을 거울로 마치려 한다. 미용실에서 그 살인자의 딸에게 머리칼을 맡겼다가 이내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혼자만의 거울 앞에 다시 앉는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종착지인 것이다.
#13. 이 영화의 감독이 칸에 가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빛을 담은) 창공의 하늘로 시작해서 (빛을 담은) 땅바닥의 더러운 개숫물로 마치는 구도에 그토록 많은 해석들이 있었던 것같다.
#14. 그의 말대로 하늘이 아닌 땅에 역점을 두고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해석학적 기도(企圖)는 시종일관 나르시시즘에 더 종사한다. 주인공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고통의 궁지에 몰린 절대 약자로 산출해내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 자기애 형식이며, 하나님의 장로를 유혹하여 배 위에 올려놓고는 그 하늘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보고 있느냐"며 나직이 그렇지만 비장하게 쏘아붙이는 프레임은 영락없이 To Die For(1995)에 나오는 니콜 키드먼의 나르시시즘이다.
#15. 나르시스트를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바람에, 이 영화가 꾀하려 했던 종교적 경계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세상엔 실제로 기독교와 반기독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윗물(창공)과 아랫물(개숫물), 그리고 그 사이에 빛들, 또 그리고 여러 나르시시스트들이 있을 따름이다.
#16.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신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거울을 가지고서 조절을 하고 있을 뿐.
따라서 이 영화에서 철창 감옥에 갇힌 죄수가 믿는 기독교는 기독교라기보다는 유심론(唯心論)이라 할 수 있고, 이 영화가 강조하는 기독교는 기독교라기보다는 유물론(唯物論)이라 할 수 있다.
에필로그
피해자의 용서를 방임하는 가해자의 기독교는 기독교라기보다는 유심론이다.
가해자의 용서를 반복적으로 후벼파는 피해자의 기독교는 기독교라기보다는 유물론이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