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동주 시인 서거 73주년에 부쳐
고유의 명절, 설날인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의 서거 73주년이 된다. 오늘도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안고 해방을 꿈꾸며 밤하늘에 별빛 같은 삶을 산 시인 윤동주와 시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윤동주 시인이 시인으로 자리한 것은 문학에 심취해 1935년 10월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제15호에「공상(空想)」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시는 최초로 활자화 된 것으로, 황순원의 시와 양주동 박사의 글이 함께 게재돼 주목을 받게 된다.
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기념해 자선시집을 77부 출판하려 했다. 시집 제목을「병원」으로 하려고 했을 만큼, 그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치유와 위로의 심장이 간절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은사이자 멘토인 이양하 교수는 일제의 출판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고, 출판경비를 조달하기도 만만치 않아 결국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친필로 쓴 시작 노트 세 권을 만들어 그 중 한권을 이양하 교수에게, 또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본인이 소장했다. 그러나 두 권은 끝내 사라졌고, 다행히 정병욱에게 준 한 권이 남게 되었다.
악랄한 일체 치하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후쿠오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위대한 시인의 존재와 그가 남긴 명시들이 하마터면 문학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것이다.
윤동주의 시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데는 연희전문학교 친구였던 강처중의 역할이 컸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중 강처중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적어 보냈고,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로 있던 그는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 4면에 윤동주의 시 <쉽게 쓰여진 시>를 발표했다.
윤동주 시를 소개한 이는 정지용 시인이었다. 그것도 윤동주 생전에 가장 존경하던 시인이었던 경향신문 편집국장 정지용 주간의 해설까지 붙여서 실은 것이다. 사후 첫 활자화된 시는 그 해 3월 1일자 김용호가 발행한「문화창조(2호)」에 윤동주의 시 <무서운 시간>이 함께 발표된 것이다.
1948년 1월 30 정음사에서는 유진오의 시집「창」과 윤곤강의「피리」를 출판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정병욱이 가진 노트 26편과 강처중이 받은 원고 5편을 모은 31편의 시로 윤동주 유고시집을 긴급 제작 발간하게 된다.
추모식용으로 벽지 표지로 만든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추모식에 10권 나옴으로써 죽었던 시인이 다시 시로 부활하게 된다.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은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으로 세상에 첫 얼굴을 내밀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시인과 그의 시를 기억하던 정병욱과 강처중, 그리고 정지용,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의 공로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역사적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역사의 기록은 소중하고 신성하다.
이 시집과 더불어 1948년 백민문화사에서 3월 1일자 발행한「백민」잡지에 고 윤동주 라는 이름으로 <슬픈 족속>이라는 시가 발표되고, 이후 1953년 9월 시와 평론집「초극」에 윤동주 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발표된다.
시인으로서 대중성을 확보하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를 정음사에서 보급용 초판으로 2종을 출간한 1955년 2월 15일 10주기 추모식 때이다, 이때 유고본에 실렸던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은 제외된다. 편집은 정병욱의 자문을 받아 윤일주가 했고 표지화를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 때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이 월남할 때 가지고 온 노트에서 80편의 시를 추가하면서, 111편의 시가 수록되게 된다. 1967년에는 백철, 박주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재간행하게 된다. 그후 그동안 게재 유보되었던 시 작품 23편을 추가하여 출판하게 된다.
1972년「현대시학」1월호는 윤동주 시집 46편이 수록되면서 시인의 시와 시 세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죽음을 공공연히 비하하던 소리가 있어 왔으나 1977년 시인의 죽음에 대한 '일경의 극비문서 전문'과 '재판 판결문'등이 공개되면서 다시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의 개방 개혁의 물결을 타고 연변대 교수로 부임한 와세다 대학 오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가 용정의 동산중앙교회 묘지에 가서 40년간이나 잡초에 묻혀있던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내고 평전을 써서 세상에 알린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윤동주 시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게 된다.
지난해 연말 '별이 된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었다. 크리스천 시인이자 민족저항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며 두 주간 동안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크리스천만이 일반인들 특히 시인, 주부, 교수, 수녀, 승려,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수천여명이 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전시회에서는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만주 북간도를 중심으로 시작해 그의 사후 출판된 유고 시집과 육필 원고, 그리고 추모 기념 작품들까지 300여점의 작품을 통해 처절했던 시인의 삶의 궤적을 소개했다.
전시회에서 참석자들은 1948년 유고시집과 1955년 발행된 초판 시집,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캘리그라피로 쓴 시 작품 등을 주목했고, 기념강연과 시낭송 시음회를 통해 시인의 정신을 되새겼다.
모두들 왜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기독교 장로교 출신에다 북간도에서 태어난 주변 인물이기에 그간 윤동주에게 무관심했던 한국교회는, 가슴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하겠다.
윤동주 시인은 사실 한국교회의 보배이자, 자랑이다.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으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뇌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맑은 영혼과 깨끗한 시심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잠시 죽은 것 같았던 그 죽음은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다시 시로 부활하여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 윤동주로 살아, 오늘도 울림이 있는 감동을 주고 있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