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이화여대 백소영 교수
문화선교연구원과 좋은영화관필름포럼(이하 필름포럼) 주최로 19일 늦은 밤 ‘필름포럼’에서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시사회 및 씨네토크가 열렸다.
이날 게스트로는 청파교회의 김기석 목사와 이화여대의 백소영 교수가 참여했고, 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인 김지혜 목사가 진행을 맡았다. 다음은 김지혜 목사의 질문과 평신도를 비롯한 씨네토크 참석자의 문답 전문.
- 영화에 대한 감상평.
김기석 목사: 모처럼 영화를 보니까 재미 있기도 하고 의미 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다양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 숨겨진 장치가 몇 가지 있는 듯 하다. 영화 시작 부분, 그리고 거의 끝날 부분 물속에 잠겨 들어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속에 담긴 종교학적 함의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고, 나중에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겠다. 동굴 모티브도 중간에 등장한다. 종교학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인데, 영화를 만든 사람이 그런 종교학적 스터디를 꾀 하고 영화를 만들었단 생각이 들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교회사에서 왜곡된 인물을 일종의 복권을 시키고 있는 것이죠. 자막엔 복음서에 근거해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실 복음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긍정적이지 않다. 외경에 속한 마리아 복음서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영화다. 영화를 본 분들이 당혹스러울 부분도 있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백소영 교수: 전반적 느낌만 말하겠다. 전 씨네토크 할 때만 영화를 보게 되는 상황인데 한 영화가 신학적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을 수 있구나 생각을 한다. 한 학기 내내 강의하는 것보다 영화 하나가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단 생각을 한다. 목사님 얘기한 바닷속 장면도, 하나님 안에 거한단 느낌이 어떤 이야기냐, 하나님과 함께함이란 부분에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고, 결국 씽크(sink)하는 것도 위로 솟는 것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나의 선택, 나의 발견이란 부분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 인상깊게 봤다.
제가 화두로 하는 게 ‘마주봄’, ‘스며듬’이란 부분인데 이게 많이 발견 되서 기뻤다.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 장면부터 산고로 힘들어하는 어린 임산부와 존재로서 마주보는데, 마지막에도 베드로가 “너는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었고, 그분도 나약하게 만들었다”고 얘기했지만, 서로의 번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주봄이었단 면에서 굉장히 신학적으로 아름답게 봤다. 그런 부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해서 그런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 감독에게 ‘막달라 마리아’는 ‘라이언’ 이후 두 번째 장편 영화다. 원래 광고를 했었고, 현재 헐리우드에 떠오르는 비주얼리스트인 신인 감독이다. 그래서 그런지 상징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 상징에 대해.
김기석 목사: 아까 동굴 얘기를 좀 했는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장면이 그렇게 등장한다. 죽은 사람 옆에서 숨을 불어넣고 동굴 속에서 깊은 번뇌에 빠지는데, 예수가 “뚜렷이 보이던게 사라진다”고 얘기한다. 그러니 마리아가 묻는다. “무엇이 사라지냐”고 그러니까 예수가 “생명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때 마리아가 격려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 장치가 놀랍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동굴은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동시에 탄생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니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만 보더라도 그 속에 보아야 할 것 보지 못할 것, 그림자를 실체로 알고 살던 자가 밖의 리얼한 세계를 보고 돌아오는 장면도 그렇지만, 종교학에서 동굴이란 것은 재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은 것이, 또 동시에 자궁을 상징하기도 한다. 생명이 잉태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예수가 내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마리아의 격려를 통해 예수가 새롭게 소생하는, 그 대목이 흥미로웠다.
백교수가 얘기한 데로 씽크(sink)의 체험, 심연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절망에 있었는데, 쭉 내려가고 있었는데 빛을 향해 올라가는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존재를 보면서 마리아와 모두가 떠오르는 자연이 나오는데, 그 물은 마치 어머니의 양수에 뜬 존재처럼 느껴진다. 죽음인줄 알았던 그 장소가 오히려 생명의 장소가 되고 있는, 생명의 역설이 앞뒤에 재미있는 장치로 있는 것 같다. 전 그렇게 봤다.
백소영 교수: 남녀의 밀밭 씬 중 역대 인상적이었던 게, 베드로도 거기서 살짝살짝 마리아를 질투하긴 하지만 사도의 자질이 많이 보이는 모습을 봤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이란 인격적 리더십 하나만 보고 모든걸 버리고 쫓은 존재였기에, 영화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는데 힘이 되어 줄 사람을 모으는 게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고, 죽어간 사람이 안타깝지만 더 큰 대의가 있다며 마리아를 재촉했다. 그때 마리아는 존재에 반응했다고 생각한다. 꺼져가는 존재에게, 그때도 ‘마주봄’이 나왔다. 운명하는 여인에게 “네가 살아가면서 했던 선행 것을 기억한다”고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장면들을 베드로가 본다. 그래서 베드로가 밀밭에서 “난 한 분을 위해 많은 걸 버렸는데 오늘 본건 자비였다”고 얘기하는 거에서 베드로도 마리아를 조금 더 마주봤다면 한다. 마지막은 그냥 질투였던 거 같다. “왜 내가 아니고 얘를 통해서”라는 질투.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했지만 계속 남성의 권위, 수제자로서의 권위라는 부분이 마리아와 함께 마주보며 복음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 게 아닌가. 마리아가 가진 온유하면서 겸손한 사도의 리더십, 사도의 부분이 잘 드러나서 밀밭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 기존 교회나 설교에서 듣기 쉽지 않은 드문 이야기 같다. 낯설고 생경한 부분에 대해 설명해달라.
김기석 목사: 막달라 마리아 하면 이미지화 된 것이 행실 좋지 않은 여인이다. 일곱 귀신들렸다 나간 여인이라 얘기하고 있다. 영화 마지막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말해서 교회사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로 인식됐다”고 하고 “2016년 교황청에서 사도 중 사도라고 복권시켰단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복음서 속에선 예수와 함께 다닌 여 제자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특별히 누가복음에 그렇고, 한 신학자는 예수 운동을 두 가지 특징으로 얘기했다. 하나는 밥상 공동체, 만나는 누구와도 식사를 함께한 것, 그리고 여성제자들 둔 사실이라고 한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에겐 허용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예수가 그렇게 했다. 또 실제로 보면 초대교회 여성들의 역할은 중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 중 좋아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16장인데, 교리적 내용 다 빠지고 바울 사도가 이런 이런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하는데 바울이란 존재를 든든하게 세워주었던 아름다운 동역자들의 이름 29명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10명이 여성이다.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교회사는 조금 불편했다.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 다는 것이. 그래서 라틴어로 번역될 때 루디아를 남자이름으로 바꾼다. 또 원복음서에선 여성들이 중요하다. 남녀차이가 없다고 얘기하는데, 제2바울서신 제3바울서신이라는데 가면 여성은 교회에서 말해도 안되고 남자를 가르쳐도 안되고 아이를 키우는 것만 되고 점점 여성 위치가 줄어든다. 이것을 대표 하는 게 영화에서 베드로가 “왜 너한테만이라고 얘기했냐”고한 것과 관련된다.
또 1906년 터키, 에베소에서 오스트리아에 고고학자가 굉장히 중요한 그림 하나를 발견한다. 동굴에서, 거기 보면 바울 사도가 손을 ‘V’모양한 바울 그 옆에 데클라란 여자가 똑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불교에도 수인들이 있는데, 손가락 두개인 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셋은 삼위일체가 대표적 수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의 크기가 똑같이 그려져 있다. 크기가 다르지 않다. 옛날 그림 문법을 보면 중요한 인물을 크게 그리는데, 여기선 크기가 같다. 근데 발굴 당시의 모습이 데클라의 눈이 훼손돼있다. 이걸 이제 누가 스크레치를 내서 훼손하고 두 손가락을 핀 데클라의 손도 훼손, 여자가 감히 남자를 가르치는걸 허용할 수 없다. 이게 교화사였다. 지속적으로 여성이 지위를 박탈당한 것, 어떻게 보면 성서에 대한 왜곡의 역사다. 근데 마리아 복음서가 외경이긴 하지만 초대교회 외경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영화적 문법을 통해 외경을 구현해냈는데, 신학을 영상에 담아놓으니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 남자들은 복음전할 과업이 중요한데 여성들은 생명에 대한 공감능력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크죠. 여성주의자가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질서 같기도 하다. 이 영화문법을 감독이 그런 측면에서 드러내고 있단 것에서 우리 시대에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 권력이 커질수록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가 드러났다. 요즘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런 일인 것 같다.
백소영 교수: 성경에서 보면 바로 왕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못 받는 이유에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한다. 내 안의 답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이 들어올 수 없는, 권력과 자기에 사로잡힌 자가 그런 것 같은데 영화 안에 유다가 자기 답에 사로잡혀서 본인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단 것에 죽음까지 이루어진 모습을 보았다. 저도 오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를 빌려왔다.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성경66권으로 완전히 닫힌 계시이고 이 외경이 사라졌거나 정경화 작업에 들어오지 않은 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고, 빗겨져 나간걸 다시 불러들여 오는 건 신앙적으로 옳지 못하단 입장에 있는 분이 있다. 그분들에게 저는 “근데 신기하지 않나? 4세기쯤 땅에 내내 묻혀져 있다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갑자기 짠하고 드러나는 것도 어쩌면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가 여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여자들이 주체가 된, 여성의 의미가 n분의 1의 목소리를 못 내던 시절이 아닌 그 시절에 마리아 복음서가 드러났단 거 어떤 면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지 되묻는다. 이런 의미가 전통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 가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영화 마지막에 기능주의적 접근이었지만 베드로가 “우린 모두 교회가 될 건데 다만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목적을 가질 거”라 하는데, 그것이 확산에 도움을 주었을 테지만, 지금 기독교가 세계의 주류담론이 된 시점에서 한 곳이 폭력적으로 작용하는 시점에 여성의 감수성을 가지고 사역을 이해한 정황을 조금 열린 마음으로 전통에 확장하는 것에 사유해도 위험하지 않단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면에 영지주의를 기독론과 분리해서 경계했던 입장에서 영지주의와 철학 신학 베이스가 있단 면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결국 복음서라는 건 하나님으로 와 계신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삶과 인격 속에서 깨달은 걸 적은 사람에게로인거다. 이걸 하나로 절대화할 필요가 없다면 다양한 시선을 모아 하나님 얘기를 확장할 수 있단 생각이 든다.
- 영화를 좋게 보셨는데, 이 영화에서 이 점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쉽다는 지점이 있는지.
백소영 교수: 영화보고서 목사님과 살짝 이야기 나눈 지점인데, 영화에 여성들을 위한 리더십을 마리아에게 위임하며, 여자들만 있는 우물가에서 설교한 장면이 있다. 거기서 이야기할 때 아주 폭력적인 윤간을 당해서 그 안에 분노가 가득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다. 공감을 잘해주시는 예수님이 중간 다 생략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는 부분이 제게 되게 불편했었다. 하다못해 가부장적 가족 윤리 속에서 아버지와 형제가 한 것으로 마리아가 마음을 닫았을 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경우는 차근차근 마음을 열어주셨는데 윤간당하고 분노가 가득한 여성에게 너를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건설할 수 도 없는 분노인데 너를 위해 용서하라 하는데, 영성은 이해가 충분히 되는데, 제가 사회윤리학자다 보니까 “용서를 하라고? 여성 운동으로 ‘미투’를 해도 현찮을 판국에”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예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집을 장사의 소굴로 만든 상황에선 굉장히 분노하시면서 둘러 엎으시는 장면을 봤는데, 예수님이 남성적 편견을 가졌다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영화에서 왜 거기서 쉽게 용서를 말했나, 저로선 아쉽고 다른 방식으로 그렸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김기석 목사: 저도 철저히 공감한다. 시편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적나라한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아름다운 언어로만 하지 않아도 된단 걸 시편이 가르쳐준다. “저 자식 좀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제가 점잖게 말했지만 굉장히 격렬한 말들이다. 그것이 원수까지 용서하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걸 읽을 때마다 영 불편한 거다. 근데 우린 예수님 말씀보다 시편 열심히 봐야 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미운 놈 미워할 수 있어야 그 감정을 내가 의식화하고 표면에 떠오르게 하고 하나님 앞에 노출이 됐을 때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부정적 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영화는 굉장히 많은 모습이 생략된 그런 모습인데, 극단적 상황에 용서해야할 수도 있다. 내가 살기위해. 근데 영화는 너무 아무 설명없이 했기에 불편한 복음들이 많이 있다. 저로서 영화에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단 점이, 예수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전개하는 건 좋다. 근데 이 영화의 배경은 로마 식민지다. 특별히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식민지가 얼마나 가혹한 식민지 전쟁을 펼쳤는지 모른다. 병든 사람이 병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 뺏겨 굶주리니까 영양결핍이 되고 면역력이 줄어들고 병에 속출 없이 노출된다. 귀신이 많이 들렸던 것은 로마의 국가 폭력 앞에 영혼이 견딜 수 없으니 분열증상, 귀신들림으로 나타난 건데 그 시대의 폭력, 그 속에 유린된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고 너무 개인화된 이야기 중심으로 진행 되는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영화에서 로마 군인이 등장하는 건 한번뿐이다. 너무 상징적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는데, 십자가 처형도 똑같다. 너무 많이 생략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 목사들이 '마리아 복음서' 같은 외경으로 설교 등을 할 수 있나?
김기석 목사: 저는 외경 얘기를 많이 한다. 또 소위 카톨릭 성경에 아홉권의 외경이 들어가 있는데, 거긴 지혜를 많이 언급한다. 저는 불경 얘기도 자주 하고, 노자 장자 얘기도 하고 다 한다. 왜냐면 그런 것들이 오늘 성서텍스트를 풍요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에 그렇다. 왜냐면 전 늘 성경이라 하는 것은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얘기한다. 제가 60년 넘게 살았는데 5분동안 산 얘기를 해달라고 해서, 그 얘기 듣고 김기석 목사를 다 파악했다고 하면 안되지 않나? 언급된 이야기도 있지만 숨겨진 텍스트가 훨씬 많다. 우린 숨겨진 텍스트 속의 메시지를 찾아낼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선 굉장히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성경을 상대화하잔 얘기가 아니고 그 속에 담긴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고 때때로 마리아 복음서, 도마 복음서 이런 것이 성서를 향해 질문을 더 많이 던져주기 때문에 인용할 수 있고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백소영 교수: 저는 목사는 아니니까 강단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자료다. 더구나 여성신학 하는 입장에서는 In Memory of Her라는 책에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까지 처음 1세기에 그려진 것만 실제의 전부가 아니란 문제제기가 있다. 역사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건 복원해 오고, 더 이상 설명 안 하는 부분을 상상하면서 넣어줄 부분이 분명히 있기에 굉장히 많이 이용하고 보는 입장 중 하나다. 문제는 어떤 것을 절대화 하는게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의 남성중심적 시각은 복음을 오해한 거야, 여성주의 신학 입장으로 이걸 밀고가야 한단 입장은 오류를 똑같이 범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저는 영화에서도 그렇고 마리아 복음서도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 예수나 마리아는 '아마도'라는 단어다. 말하자면 계속 진리를 찾아가는 추구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저희 크리스천은 그런 자세여야 한다는 생각인데, 복음을 흐리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복음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료를 곱씹는게 분명 필요할 텐데 거기에 삭제된 시각을 준단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지, 양자택일하는 텍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기존의 예수 영화와 비교할 때 이미지는 어떠한가?
김기석 목사: 그림 속에서 서양미술사 굉장히 중요하다. 막달라 마리아를 그렸던 그림들은 다 전제가 창녀다. 마리아의 모습은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형상화 됐다. 어거스틴이 먼저 이 교리를 만들면서 여성을 좀 위험한 인물로 만드는 것. 여성은 유혹에 약하고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그래서 이단에 빠질 가능성도 많고 인간의 원죄란 것이 성적 교섭을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하니, 여성은 언제나 죄를 전달하는 주체로 여겨지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교리적 측면에서 다루기 매우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듯 다른 접근을 해봤던 거고, 이런 상상력이다. '예수도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 않았을까? 평범이 얼마나 큰 유혹이지? 포루트칼 소설가가 '예수 복음'이란 책을 썼는데, 소설 내용이 요셉이 목수로 동원됐다가 군인이 아이들을 죽이러 가는 사실을 알아서, 자기 아들 예수만 빼돌리고 베들레헴 아이들은 다 죽는다. 요셉은 자기 아들만 살렸단 부담이 있어서 로마에 투쟁갔다 처형 당한다. 예수는 잠자리 들 때마다 아버지 요셉이 자길 죽이러 오는 것 같은 꿈을 꾸고 달아난다. 그러나 발을 다쳤는데 치료를 받기 위해 들어간 집이 막달라 마리아 집이다. 창녀다. 그 소설 속에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쉽게 얘기하면 득도한다. 사랑의 신비를 배우고 세상을 어떻게 품을지 그 여인을 통해 배운다. 마리아가 예수의 스승으로 나온다. 근데 이 영화에서도 약간 그런 부분이 얼핏얼핏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건 상상이다. 오해하기 쉬웠던 것이 뭐냐면 복음서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렇다. 자막의 문제다. 마리아 복음서인데 마리아를 빼고 복음서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오해하기 쉽다. 대부분 많은 것이 상상력에 의존한다.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 사건을 재현하는 일들은 금방 얘기했든 화가와 소설가가 많이 다룬다. 이건 더 많이 해야하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백소영 교수: 영화마다 예수의 이미지를 다 분석할 만큼의 영화를 보진 못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는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봤다. 그 영화에서 하도 피를 철철 흘리는 장면이라 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일어날 수 없던 지점이 있었는데 거기선 인성의 부분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 구속의 보혈이 충분히 굉장히 많이 강조됐던 것만 리얼하게 그려진 부분만 기억이 남고, 그거에 비한다면 이 영화는 예수의 인성부분에 있어서, 잘못 생각하면 신경쇠약증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영적으로 예민한, 제가 존재의 기공성이라는 것으로 신학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 안에 자기의 존재를 겸손하게 연 사람은 영화의 바닷속에 빠진 사람처럼 영혼의 숨구멍을 통해 하나님을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단 신학적 입장을 요즘 묵상하며 글도 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그 부분을 잘 표현했던 예수님인 것 같다.
영화에서 예수님이 자꾸 중요한 순간마다 쓰러진다. 계속 실신하시는데, 그 부분이 전혀 이해를 못하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존재의 흐름을 잘 받아들이는 영혼의 민감성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쓰러진 순간들을 놓고 보면 막달레나에서도 공격을 하며 들어온 사람의 엄청난 살기, 성전에서도 가로막혀있는 사람들의 죽음의 기둥들을 느끼시며 힘들어하신 거 같고, 유다가 가진 엄청난 닫혀있는 기대를 마주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스승으로써 “너는 잘못 알았어 F야” 이러는게 아니라 고통 받는 느낌으로 묘사된 예수, 이런 모습은 저도 인상 깊었다.
그랬기에 막달라 마리아로부터도 한 사람의 일반적 스승이었다기보다 그가 만난 하나님, 사실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들렸단 표현이, 안에 있는 내면의 빛, 내면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 여성에 대한 이해를 닫혀있는 사람이 볼 때는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 부분을 불러주고 터치하는 장면이 있다. 마리아 안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도 하나님이 계신데 그런 부분들이 만날 지점을 그린 게 아닌가. 마리아가 힘들 때 예수님 안의 하나님이 불러일으켜주고, 예수님이 힘들 때 마리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떤 힘으로 도와주고, 사실 보면서 창세기의 에제르 크네그도(돕는 배필) 했단 마주봄 같은 도움, 파트너쉽, 부분을 많이 읽은 거 같다.
- 성경에서 부활의 소식을 듣고 달려나간 베드로가 영화에선 도저히 저 방 밖으로 나갈 것 같지 않다. 원하는 주제를 위해서 남녀를 대척시킨 게 아닌가?
백소영 교수: 대립 구도가 있는게 맞는 부분이다. 우린 베드로가 정말 뛰어갔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자료가 충돌할 때 팩트체크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저희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누가 봤느냐는 권위, 사도의 권위 때문에 중요한 부분인데, 이 경우는 솔직히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남녀싸움이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주의적 사고방식이 여자가 부활의 증인이란 부분을 삭제하지 않은 것은 적어도 초기 공동체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고백, 증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전통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란 이성적 추측이 가능하다. 베드로가 뛰어간 것이 뒤에 썼든 어쨌든 남녀택일하거나 폄하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한다.
- 부제가 부활의 증인인데, 하고자 하는 얘기를 위해서 굳이 부활과 십자가 장면이 없어도 될 거 같다. 부활의 의미를 모르겠다.
백소영 교수: 마리아 복음서가 외경이 되는데 가장 큰 요소였다고 전 생각한다. 마리아 복음서에 보면 부활한 예수님과의 대화에 “환상 중에 주님을 뵈옵니다”라고 얘기한다. 영화에서도 베드로가 너 꿈에서 봤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 영화의 대사를 말씀하시죠. 이런 순간에 너는 놀라지 않는 구나. 그 부분이 있는데 신학자들이 얘기하는 건 여기서 다 얘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얘기한다. 전 조직신학자는 아니지만, 마리아가 생각한 부활이라고 한 것이 영지주의적 차원일 수 있는데, 육신의 부활이라는 부분이 크게 방점이 찍힌 게 아닌 것 같다. 부정했단 뜻이 아니라 '죽음 조차도 그분을 가둘 수 없었어요'라는 마리아의 신앙고백처럼 그 안의 하나님과 바다에서 살아가듯 계속 함께하는 삶 속에서는 어떤 것도 다 극복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십자가와 부활이란 과정을 통해서 경험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한다. 그 부분이 없었어도 되는 문제는 아닐 수 있다. 그 전에는 '아마도'라는 단어를 쓰고 답을 찾는 느낌인데, 부활 이후 예수를 만난 후에는 나긋나긋하면서도 확신에 차서 얘기한다. 자기를 배제하려는 사람을 향하여 분노하지 않고 그러나 나는 들려질 것이다. 확신에 찬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거죠.
김기석 목사: 죽은 자가 정말 살아났냐 안 살아났냐 신학적 논쟁했냐 답도 없다. 우린 믿음으로 고백한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어야 했는지, 돌아가셔야 했는지, 근데 예수님이 성전 정화사건 이후에 마리아의 눈을 발 닦았던 그 물로 닦는데, 이게 눈뜸이거든요. 이게 부활이죠. 새로운 세계죠. 내가 보고 있던 게 절대의 세계로 보였는데 그것이 상대화 되면서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나니까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부활로 볼 수 있죠. 그렇게 마리아가 든든히 서자 마치 여성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와서 참여하는, 부활의 몸들이 되고 있는, 영화 속에 그런 장치들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 마리아와 예수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서로 연인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그것을 의도한 건가?
김기석 목사: 저는 두 배우가 연인인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영화에서 그렇게 보고 싶으면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재들이 있다. 친밀함. 아까 마주봄 얘기를 했는데 그 관계를 이성의 사랑 관계로 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보겠죠.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걸 우리가 막을 도리는 없다. 그런 오해의 소지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또 그런 친밀함을 느끼면 안되나?란 생각도 한다.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 하면 창녀로 얘기된 것 중의 하나는 막달라 라는 지역이 로마군의 주둔지다. 그러니까 일종의 기지촌이다. 그러니까 막달라 여인하면 기지촌 여인으로 사람들에게 이미지화 된 거죠. 아픈 이름이다. 다른 마리아들은 자기의 고향 얘기와 더불어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막달라 마리아만 그렇게 등장한다. 지긋한 아픔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거죠. 아까 얘기했듯 이 세기 상황이 영화 문법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를 얘기할 때도 마리아가 그 나라는 우리 내면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자칫하면 예수가 전했던 하나님 나라를 너무 내면화 시켜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 나라 제국은 로마 제국에 마주서 있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영화는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조금 아쉽네. 그걸 염두하고 보면 좋을 거 같다.
백소영 교수: 저는 두괄식으로 하자면 마리아가 마지막에 한 얘기처럼 '이건 중요한 게 아냐'. 최후의 만찬 장면이 마치 혼인잔치처럼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마리아와 예수가 둘이 들어가더니 빵 띄어 먹고, 의도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정통은 아니지만 어떤 스토리들의 라인은 그랬다고 흘러오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도 100%인간이었는데 인간의 모든 걸 안 하고 산다는 게 더 이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친밀함의 감정이 무슨 색깔이었든 인간성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저한테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의 신성을 폄훼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야말로 영지주의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몸으로 산 삶을 우리가 부정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둘이 어디까지 무슨 관계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새로운 전통을 확장할 수 있는 이야기를 넣으면서 논란이 가능한 장면을 넣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불필요한 논쟁 여지를 줌으로써 강조하고 싶은 걸 강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