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염려하는 백합화
옛날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개울가 옆에 서 있었던 한 그루의 백합화가 있었다. 그녀는 쐐기풀과도 잘 알고 지냈고, 근처에 작은 다른 몇몇의 꽃들과도 잘 알고 지냈다.
복음인 내가 설명한 대로, 백합화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아름답게 옷을 입고 있었고, 게다가 기뻐했고 하루종일 아무 걱정도 없었다. 재잘거리며 사라져 가는 흐르는 시냇물처럼, 시간은 어느 사이엔가 행복하게 슬쩍 흘러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새 한 마리가 백합화에게 찾아왔다. 그는 다음 날에도 또 찾아왔다. 그 후 며칠 동안 다른 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또 찾아왔다.
이 일로 백합은 이상하고 설명 불가능한 충격을 받았다. 꽃들처럼 새가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 것은 설명 불가능한 것이고, 새가 그렇게 변덕스러울 수 있다니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나 보니, 백합화는 점점 더 새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새의 변덕 때문이었다.
이 작은 새는 개구쟁이 새였다. 백합화의 입장에 서기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기뻐하기보다, 그녀의 순결한 행복에 기뻐하기보다, 새는 백합화에게 자유의 부족을 느끼게 만들고 자기는 자유를 만끽하며 과시하곤 했다.
게다가 이 작은 새는 수다쟁이였다. 그는 때로는 말을 빨리 했다가 때로는 천천히 말하기도 했고, 다른 장소에 대한 진실한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섞어서 말하기도 했다.
다른 곳에 가 보니, 완전히 다른 백합화가 있다는 둥, 거기에는 기쁨과 황홀이 있다는 둥, 향기가 가득하다는 둥, 색이 화려하다는 둥, 새의 노래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이것이 새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새의 이야기는 언제는 백합화에게 망신을 주는 이야기로 끝났다. 즉 그런 종류의 영광과 비교할 때, 이 작은 백합화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너무 보잘것없기 때문에 백합화가 실제로 백합화로 일컬을 수 있는 권리나 있는 것인지 그게 의문이라고까지 말했다.
바로 이것이 백합화가 염려하게 된 내력이다. 백합화는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새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염려하게 되었다. 그녀는 밤에 더 이상 조용하게 잘 수 없었고, 아침에 기쁘게 깰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감옥에 갇혀 속박된 것처럼 느꼈다.
그녀는 졸졸졸 흐르는 물도 지루했고, 하루가 너무나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린다. "기분 전환을 위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도 좋은 일일 수 있지. 그러나 언제나 같은 소리를 듣는 것, 허구한 날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너무 지루하다."
"어쩌다 한 번 정도 홀로 이런 외딴 곳에 머무르는 것은 즐거운 일일 수 있지.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한 평생을 머물면서 잊혀지는 것, 친구가 없거나 친구로 쐐기풀을 두고 있는 것, 그러나 쐐기풀은 백합화와 아무런 교제가 없다. 이건 정말로 참을 수 없다."
그녀는 혼자 계속 중얼거린다. "작은 새가 내게 보잘 것 없다고 말한 대로 내가 그 정도로 보잘것없고, 그 정도로 열등하다니! 오, 왜 내가 다른 곳에 다른 환경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왕관초가 되지 못했을까?"
이렇게 말한 것은, 작은 새가 백합화에게 모든 백합화들 중에서 왕관초가 가장 아름다우며 다른 모든 백합화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백합화는 염려로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으나, 그때 그녀는 현명하게 자기 자신과 이야기했다. 이것은 아직 그녀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염려를 추방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고, 염려가 합당했다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말했다.
"결국, 나의 소원은 어리석은 소원이 아니었던 거야. 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예를 들어, 내가 될 수 없는 새가 되기를 구한 것도 아니지. 나의 소원은 아름다운 백합화가 되려는 것, 혹은 가장 아름다운 백합화가 되려는 것뿐이야."
이런 와중에도, 작은 새는 왔다갔다 했다. 헤어지고 만날 때마다, 백합화는 더욱 더 혼란스러웠다. 마침내 그녀는 모든 비밀을 새에게 털어놓았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염려에 종지부를 찍고 상황을 바꾸자고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새가 왔다. 새는 부리로 쪼아 백합화의 뿌리로부터 흙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이 일이 끝나자마자, 새는 백합을 데리고 날아갔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새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는 아름다운 백합화들이 피어있는 곳에 그녀를 데리고 날아가 준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거기에 심길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 이것이 서로의 약속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새로운 장소와 환경에서 부푼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모든 백합화들 중에서 아름다운 백합화가 되는 데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마도 심지어 왕관초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모든 백합화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슬프다, 그러나 백합화는 가는 도중에 말라죽고 말았다. 염려하는 백합화가 백합화인 것에 만족했더라면, 그녀는 염려하지 않았을텐데. 그녀가 염려하지 않았더라면, 거기 서 있던 곳,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 가운데 서 있었던 곳에 계속 남아 있었을텐데. 그녀가 거기에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그녀는 목사가 주일날 설교했던 바로 그 백합화가 될 수 있었을텐데.
내가 "백합화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도 못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는 이 백합화가 되었을텐데.
이것은 더 아름다운 백합화가 되고 싶거나 왕관초가 되고 싶은, 염려하는 백합화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백합화는 사람이다. 개구쟁이 작은 새는 비교의 불안한 정신이다. 이 정신은 이리저리 방황한다. 변덕도 심하다. 이 정신은 다양성의 병적 지식들을 끌어 모은다. 새가 백합화 입장에 서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비교할 때 우리를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든, 다른 사람을 우리 입장에 놓든, 우리도 다를 바가 없다.
작은 새는 시인이며 유혹자이다. 혹은 사람에게서 시적인 것, 유혹적인 것이다. 시적적인 것은 새의 이야기와 같다. 거기에는 참과 거짓, 소설과 진실이 있다. 거기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적인 것은 절망하든 승리하든 열정적이어서, 다양성이 최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비교의 염려에서, 염려하는 자는 마침내 너무 멀리 가서 다양성 때문에 그가 사람인 것을 망각한다. 그는 절망하여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다르다고 여긴 나머지, 백합화가 너무 보잘것없어 실제로 백합화인지 의문이 든다고 생각했던 작은 새처럼, 그는 자기가 사람인 것과는 너무 다르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마도 염려에 대한 합리적인 방어는 언제나 이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새가 되는 것과 같은 비합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이 특별한 것이 다른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그 특별한 것이 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의 움직임과의 비교가 염려의 열정을 일깨울 때, 그리고 비교가 염려하는 자가 그의 뿌리를 두고 있는 땅에서 뽑아낼 때, 즉 비교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를 뽑아낼 때, 비교는 그를 데리고 그가 원하는 곳에 가서 그를 심을 것처럼 보인다.
비교는 확실히 오고 그를 데리고 간다. 그러나 유일하게 죽음이 사람을 데리러 오는 것처럼, 비교는 염려하는 자를 낙담으로 뒤흔들어 말라 죽게 한다.
당신이 왕관초가 되기 위해서 염려했던 백합화를 생각했을 때, 또한 그녀가 여행 도중에 말라 죽었을 때, 당신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오, 그러나 당신이 사람이 동일하게 어리석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 정말로 그렇게 어리석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절대 아니다. 내가 어찌 이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거룩하게 임명된 선생님인, 들의 백합화들을 이런 식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백합화는 이런 식으로 염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백합화에게서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백합화처럼 사람이 사람인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일시적인 염려로 아프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일시적인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에게 할당된 장소에 남게 될 것이다. 그가 거기에 남게 된다면, 그때 당신은 사람이 됨으로써,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욱 아름답게 될 것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