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선교칼럼] ‘예배’가 ‘생명’이라고 외치는 교회여!
"예배가 생명"이라고 한국교회는 줄기차게 외친다. 정말 그런가? 이런 질문을 하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당장 정죄하면서 흥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한국교회에 제안한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면, 너무 예배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다. 30여년 혹은 그 이상, 주일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또 그렇게 배워온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또한 청년 시절에, 교회 전도사 시절에, 강단에서 외치는 담임목사님의 메시지는 '성수주일'에 대한 이야기가 매 주일 반복됐던 것으로 기억하고, 세뇌됐다고 본다.
혹시 주일에 국가고시가 진행될 때면 그것마저도 포기하고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와 더불어,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셨다는 간증과 함께 말이다. 충분히 그렇게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그러한 경험을 신앙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주일에 비행기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났다. 어떤 집사님은 그 비행기를 타지 않고 주일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 날 갔기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일성수를 하라는 메시지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또 하나의 오류이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는 식으로 겁을 주면서 메시지를 선포하던 한국교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지금도 행태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주일성수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처럼 강조하면서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심각한 말씀의 왜곡이다.
오늘날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 찬양 예배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역시 예배 중심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모이는 것은 목회자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이상한 것은 대부분 예배에 대해 강조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이 외치는 것처럼 주일예배를 반드시 참석하라고 강조하는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기초가 되는 구약의 성경을 살펴보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본다. 성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도 나온다.
반면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성전의 땅을 밟지 말라는 내용과 너희들이 가져오는 재물, 너희들이 부르는 찬양과 비파의 소리를 극히 싫어한다는 내용을 아모스에서는 아주 쉽게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라기에서는 성전에서 수고하는 제사장들에게 엄한 경고의 모습을 본다. 똥 치우듯이 치워버린다고, 얼굴에 똥을 바른다는 극혐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보게 된다. 다른 여러 곳에서도 아주 쉽게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예배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직 교회에 나와 예배만 하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배워왔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주일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면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긴다. 주일에 바쁜 일이 있으면 1부 예배에 얼른 참석하여 의무를 다하고 볼 일을 본다.
아모스는 오히려 예배에 앞서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 외치고 있다. 다른 선지자들의 외침을 살펴보라. 대동소이한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이들은 글쓴이가 예배를 무시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모스나 예레미야나 말라기 선지자나 예배를 무시하는 듯한 내용의 메시지를 선포하지만, 절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 또한 그렇다.
올바른 예배는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바로 삶의 현장이다. 이것이 구약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다른 주제와 다른 교훈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필자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배를 통하여 '신앙인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강조하고, 교회 안에서 '믿습니다' 외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교회 안에서만 서로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 역시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의 헌신과 섬김과 봉사는 세상을 향하여 하는 것이다. 대상이 다른 것이다.
우리끼리 섬기고 봉사하고 먹고 마시고 하는 것도 교제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고 중심이 되어버린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책망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너무나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고 성을 높이 쌓았다.
말하고 싶은 핵심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예배하는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의 삶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즉 구약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신앙의 모습인 삶의 현장에서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라는 것이다.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
직장에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왕따당하기 쉽고, 매우 많은 갈등을 일으키기에 안성맞춤이다. 거대한 조직사회 속에서 공의를 외치고 정의를 실행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엄두도 못낼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 해서 성도들의 의식까지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언제 기회가 주어질지 모른다. 그때를 위하여 바르게 교훈하고 바른 생각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런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목사들의 무거운 책임임을 알아야 한다.
현장에서 공의와 정의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이 어렵고, 어떤 때는 불가능해서, 그 문제를 들고 교회에 모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하면서 말씀으로 도전을 받고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새 힘과 도전을 받고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살아있는 예배의 목적 아닌가? 이를 위하여 교회에 모이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함께 나누고 고민하고 격려하고 붙잡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도전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이러한 도전이 어렵기 때문에 비로소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목사들의 물질주의적인 세속화된 예배관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산다. 그리고 신자들이 바르게 살아가게 된다. 그래야 사회가 변하게 되고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교회가 많다고, 십자가가 여기저기 널려있다고 사회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강단의 선포를 통하여 사람들이 생각하고 변하게 되는 것이니, 바른 가르침이 중요하고 복된 일인가 하는 것은 말이 필요 없다.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은, 목사가 바로 서는 것이다. 강단의 메시지가 바르게 선포되는 것이다. 예배 중심의 지나친 개인주의적 경건주의 신앙의 태도를 버리고, 사회와 공동체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예배를 가르쳐야 한다.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강단에서 전해지는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살피고 살펴야 한다. 무조건 "은혜 받았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맹목적 앵무새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편하고 그 속으로 도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배함으로 세상에서 행할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 아닐까!!!
세르게이 선교사(러시아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