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39)
성령의 은사 열풍의 시기
한국교회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북전쟁 그리고 이후 고착된 남북 분단의 비운을 맞이하면서 극심한 이데올로기 논쟁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내에도 사랑과 이해와 화합 대신 정죄의식과 흑백논리로 인한 양극화 대립 구조가 심화되었다.
한편 전쟁 이후 재건의 의지를 다지면서 우리나라는 온 국력을 경제적 타개를 위한 산업화와 근대화에 매진하게 된다. 한국의 각계각층에서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비중이 높아갔고, 교회 역시 그 영향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해외로부터 소개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의 교회성장론, 그리고 필(Norman Vincent Peale)이나 지글라(Zig Ziglar) 등의 적극적 사고방식 등은 교회의 신앙에 물질주의적 호소를 하는 데 더 유력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두 가지 묵과할 수 없는 정신성, 즉 양극화 대립 의식과 물질주의 의식은 당시의 성령론 신앙과 논쟁 속에도 여지없이 반영 되었다. 그 중 양극화 대립 의식은 방언이나 성령세례 주제를 다루는 신학 논쟁 속에 현저하게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으며, 물질주의 의식은 성령을 물량적으로 더 많이 받겠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성령의 각가지 은사들을 더 많이 받아야겠다는 생각 등이 이 시기의 성령론 신앙에 크게 드러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재건되기 시작한 한국교회에는 복음적 성령론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성령의 삼위일체성과의 관계,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교훈 등, 성령론의 핵심 내용에 대해 대부분의 성도들은 잘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타 종교나 기독교 이단들에서 나타나는 신비 현상이나 능력 현상은 분별력 없는 신도들이 미혹되기 알맞은 것이었다. 마치 타종교 영성에서 그러하듯이, 성령의 은사나 능력은 많이 구하는 자에게 많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신념이 기독교인들에게도 농후했다. 이에 대해 필자가 경험한 한 예를 소개한다.
<case>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때 신학생 시절이었던 필자는 기도원을 자주 찾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나는 평소부터 가고자 마음먹고 있었던 어떤 큰 기도원에 한 주간 기도하러 갔다. 그런데 기도원 초입 안내소에서 나는 어리둥절한 일을 만났다. 등록하는 사람들에게 안내원이 가슴에 붙이는 표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슴표에는 각기 색깔이 있었다. 흰색, 노란색, 파란색 그리고 빨간색의 네 가지였다.
'아, 저건 아마도 교회 직분에 따라 달리 나눠주나 보다. 흰색은 초신자, 노란색은 집사, 파란색은 권사, 그리고 빨간색은 목회자. 왜 그럴까? 참 이상도 하구나'
그런데 내 예상은 크게 벗어났다! 그 가슴표의 색깔은 교회 직분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 받은 레벨에 따라 나눠주는 것이었다. 흰색은 아무 은사도 못 받은 사람, 노란색은 방언 하는 사람, 파란색은 방언에다가 방언 통역까지 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랑스러운 듯 보이는 빨간 색은 방언에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까지 하는 사람.
나는 기도원에서 며칠 지내면서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흰색 가슴표를 달고 고개를 떨구고 겸손히 다니는 목회자들, 그리고 빨간색 가슴표를 단 허리가 꾸부정한 여권사님에게 안수 받겠다고 줄지어 따라다니는 행렬. 그런가 하면 오후 2시 은사집회 시간에는 가슴표 색깔 별로 모여서 더 큰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기도하는 풍경. 그때 그 틈에서 필자는 그나마 창피스러움을 면할 수 있어서 매우 다행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나의 가슴에는 노란색 표가 달려있었기에.
이처럼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운동'이 열풍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의 은사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소문까지도 퍼져 있곤 하였다. 위의 사례에 등장한 기도원이 바로 은사 받기로 가장 유명한 기도원이어서, '이 기도원에 오면 강아지도 방언을 받는다.'는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한편, 당시 한국교회 개혁주의 계통의 신학교에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이 소개되어 가르쳐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방언이나 환상이나 예언 등의 오순절적 체험을 신비주의로 배격하는 경향이 심했다. 이러한 반대의 입장은 비단 개혁주의 계통 신학교만이 아니라 웨슬리안신학을 따르는 감리교나 성결교회 계통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