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7일, 세상의 눈이 판문점으로 향했다.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났다. 그리고 서로 손을 맞잡고 평화를 희망했다. 한때 전운이 감돌았던 한반도에서 이젠 많은 이들이 봄을 고대하고 있다.
한편 경계의 시선도 없지 않다. 어쩌 한나절에 드러난 말과 웃음, 행동만으로 평화가 오겠느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저들인데! 그러니 들뜨지 말고 좀 더 냉정하자는 게 이들의 충고다.
일리가 있다. 한반도는 70년이 넘도록 갈라져 있었다. 그 상처가 아무는 데도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친구 사이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남과 북이랴. 따라서 신중하고 차분해지자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번 남북정상회담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구약성경 '요나서'가 떠올랐다. 4장에 걸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에겐 꽤나 유명하다. 우스꽝스럽고 때로 진지하며, 한편 어그러진 요나의 모습에서 자아를 발견한 때문일까? "요나를 거꾸로 읽으면 '나요'가 된다"니, 언중유골(言中有骨)이 따로 없다.
아무튼 요나서를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에게 큰 성읍 니느웨로 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 하신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악독한 까닭이다. 하지만 요나는 어리석게도 사명을 거스른다. 배를 타고 줄행랑을 치지만, 하나님 손바닥 안이다. 다시 그 사랑에 붙들린 요나, 결국 니느웨로 향한다. 그리고 거침없이 선포한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 3:4)
그런데 웬걸.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을 듣자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심지어 니느웨 왕까지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는다. 그러고는 식음을 전폐한 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과연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저지르던 자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회개했고, 그들의 바람대로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셨다.
요나에겐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체면이 구겨진 탓일까? 감히 하나님 앞에서 싫은 티를 숨기지 않는다. 이런 저런 말로 투덜거리는 요나. 급기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요나 4:3)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다. 마치 철없는 아이의 투정을 보는 듯하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되묻는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요나 4:4)
북한 세습 독재자들과 그들의 정권으로 인해 그곳 주민들, 우리의 동포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지는 굳이 더 근거를 대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북한 정권을 비판했고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했다. 불의에 대한 정당한 울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노가 잘못하면 요나의 그것일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은이 니느웨 왕처럼 회개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 여부와 관계 없이 "북한 정권을 향한 심판"을 외치면서도 언제나 먼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려 애쓰자는 것이다. 혹 자기 감정에만 치우쳐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는 건 아닌지.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요나 4:11)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제 그만 서로를 향하는 총부리를 내려놓았으면 한다. 북한의 주민들도 우리처럼 마음껏 하나님을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김정은의 말을 섣불리 믿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에 앞서는 하나님의 섭리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