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은 내게 구원받을 만한 실력이나, 내 안의 구원받을 만한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사랑의 확신에서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근거를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요일 4:16-17). 구원 확신의 전제는 사랑의 확신입니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인의 정죄 받지 않음에 대한 확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결부지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4-39).”
다른 성경에서도 ‘하나님 사랑의 확증’을 ‘구원의 확신’과 연결짓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고(사랑의 확증),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구원의 확신, 롬 5:8-9)."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니, 그가 나를 버리시거나 내가 멸망에 빠지도록 방치하실 리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뿐 아니라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누가 "나는 믿음이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하든가,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믿지만 내가 구원받을 것인지는 확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언어모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 확신의 근거를 엉뚱한 데서 찾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심원한 성경 지식에서 오는 줄 알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성경 지식을 섭렵하는데 매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가져도,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한 구원의 확신은 요원합니다.
사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안다는 것인데, 그들은 많은 성경 지식을 갖고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 지식이 참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유대인들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고 하신 것은, 그들의 성경 탐구열이 참된 신앙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단들이 그토록 성경 탐구열이 뜨거움에도 예수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또 하나는 서두에 언급했듯, 구원 확신의 근거를 자기 내면의 대이터 베이스(database)에서 찾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당연히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실패는 과거 일부 엄격한 청교도들에게서 이미 발견됐습니다.
웨스트민스터채플의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의 후임 목사 켄달(R. T. Kendall)이 "구원의 확신을 자기 내면에서 찾던 일부 청교도들은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은 되새겨 볼 만합니다. 구원의 근거를 자기 내면에서 찾는 한, 구원의 확신은 요원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 사랑에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역시 자신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신뢰를 둘 때만 가능합니다.
케빈 밴후저(Kevin J. Vanhoozer)가 말한 믿음의 정의도 동일한 관점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자신이 얼마나 신실한가를 하나님께 보여드릴 필요는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나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진술보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는 진술을 더 좋아합니다. 내가 비록 형편없는 자일지라도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어코 나를 구원하실 것이며,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한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구원의 커트라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핵심 내용인즉슨, 구원받는데 있어 내 편에서의 최소한의 노력 곧 커트라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 실력을 점검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원의 원인을 자기 내면에서 찾게 하는 이 가르침 역시 구원 확신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끝으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돼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연관지운 앞 내용과는 정반대입니다. 물론 이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 확신의 두텁기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역시 인간 행위에 근거를 둔 구원의 확신이기에 지속성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구원의 확신을 사랑의 교감물(交感物)로 보는 입장입니다. 곧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난다는 일반적 원리에서 조망한 것입니다. 예컨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면-그가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불량아일지라도-그가 결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식에 대한 무한 신뢰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전 13:7)"고 한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함'과 '예수 믿음'을 연결지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곧 유대인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2-43)."
교회사에서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랑'과 '믿음'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여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구원얻는다"고 말했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런 의미가 아닌, 사랑이 믿음은 불가분임을 강조한 것이며, 오늘 우리의 주제와도 연관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흔히 상상하듯 성경을 많이 아는 지적 지수(知的 指數)위에 구축된 것도 아니고, 내 안의 구원 지수 위에 구축된 것도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와의 인격적인 교감(성령의 교통) 속에서 생겨난 부산물입니다.
우리는 탁자 위에 놓인 펜을 보면서 "여기 펜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여기 펜이 있습니다"라고 할 뿐입니다. 이 진술에는 인격적인 신뢰를 동원할 필요가 없으며,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진술만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신다" 라고 말할 때는 "여기에 펜이 있다"고 하듯, 단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술만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비인격체인 펜(pen)과는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계신다"는 진술에는 이미 신뢰와 애정이 투영돼 있으며, 이는 사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는 진술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감 속에서 된 진술에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 가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그리고 존 번연 같은 복음 설교자들이 "하나님은 계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다"라고 선포했을 때, 무덤덤하게 남의 얘기하듯이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구원의 확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내가 비인격적인 '피자 치즈'를 좋아한다는 것과 같이 상호 교감이 없는 일방적인 애호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그에게 전달되고 또한 내게 대한 그의 사랑이 내게 전달되는 상호 교감이 일어나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견고한 신뢰 곧 구원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이는 바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잠 8:17)"는 성경 말씀의 구현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결코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그칠 수 없다는 확증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