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마 6:29)."
솔로몬이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지배자요, 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어쩌면 이 명령에 가장 잘 순종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후, 서구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있다.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는가? 이 그림은 이런 서구의 제국주의를 풍자한 것이다. 오른쪽 선교사는 성경을 들고 있고 토착민은 기계에 누워 착취를 당하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데 관심이 많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들이 솔로몬을 좋아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가 누린 영광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the lord of creation'이다. 곧 '창조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말 역시 교회용어사전을 보면 창세기 1장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데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들의 백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합은 어떤가? 백합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나님을 닮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백합보다 얼마나 더 아름답겠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백합과 같은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위적으로 인간이 만든 솔로몬의 영광, 지배자의 영광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인간은 도대체 언제 백합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는가? 서양 철학에서 보면, 인간의 위대함을 '직립 보행'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곧추선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데서 인간의 영광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처럼 지배자가 된다고 과연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가? 아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 더욱 하나님을 닮는다. 곧추선 인간이, 스스로를 "창조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자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을 때, 다시 말해 예배의 자리로 돌아갈 때 그는 더욱 하나님을 닮는다.
예배가 무엇인가? 가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이다. 또 염려하는 자가 백합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할 수도 있다. 이런 놀라운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가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감탄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예배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닮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닮은 것은 사람뿐이다. 곧 하나님의 영광은 백합처럼 눈에 보이는 영광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을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닮는 것도 아니다.
예배자는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하나님을 닮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무릎을 꿇을 때만, 하나님이 창조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만, 그는 더욱 하나님을 닮는다. 이것이 예배다. 이런 의미에서 백합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백합의 아름다움도, 이런 예배자의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도 시들어버리는 비극이다. 그러나 예배자의 아름다움이란 영원히 존속한다. 따라서 들로 간 염려하는 자가 모든 증인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을 때, 모든 꽃들이 그에게 "하나님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할 때, 그는 대답한다.
"그래, 작은 자야, 내가 꼭 기억할게. 가엾은 자야, 너는 그분을 예배할 수 없지만, 나는 그분을 예배할 거야."
결국 곧추선 사람은 예배자였던 것이다. 똑바로 선 걸음걸이는 탁월함의 표시다. 그러나 예배와 경배로 엎드릴 수 있는 것은 훨씬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자연은 지배자인 사람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는 큰 무리의 종과 같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지배자가 돼야 하는 것, 그리고 이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아니 사람이 예배함으로 창조자를 찬양할 때, 아름다워지고 더욱 하나님을 닮는다.
자연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생각나게 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이것을 기억하라. 백합처럼 옷 입혀지는 것은 아름답다. 똑바로 선 지배자가 되는 것, 이것 역시 영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예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nothing)가 되는 것, 이것은 얼마나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