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를 만나다] 염려의 완전성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새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완전한가? 사람이 위험 속에서 위험을 인식하지 못할 때,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 위험 속에서 조심성이 없는 것은 완전한가?
사람이 눈을 가리고 걷기 때문에, 확실하게 발을 내딛는 것, 몽유병자가 잠을 자면서 걷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걷는 것, 이것은 완전한가! 아니, 결코 아니다.
그때 위험을 인식하는 것, 위험에 맞서는 것, 깨어 있는 것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오히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염려할 수 있다는 것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 5:48)".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는가? 새를 통해 배워보자.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이런 새의 비상은 아름답지만, 너무 가볍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믿음의 날개로 날아오르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이유다.
영적인 의미에서, 새의 날갯짓은 연약하고 은유적인 암시인 반면, 이런 믿음의 날갯짓은 완전한 것이다. 그렇다. 지친 새가 기진맥진한 날갯짓을 하면서 서서히 땅에 가라앉을 때, 새들 중에서 가장 대담한 새의 가장 자랑스러운 비행도 하늘 높이 날아가는 믿음의 비행과 비교할 때, 세상적이고 일시적인 피로에 불과하다. 그것은 믿음의 쉬운 상승과 비교할 때, 느린 하강에 불과하다.
이것을 조금 더 세심하게 조사해 보자. 새는 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없을까? 새는 순간에만 살기 때문이다. 새에게는 영원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완전한가! 반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는 어떻게 생기는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의 의식에서 생긴다. 더 정확히 말해, 사람이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의식 속에서 그는 영원히 멀리 있고, 순간을 초월하여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떤 새도 그렇게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새가 의심하지 않는 위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영원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역시 "내일"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도움으로 그는 가장 넓은 지역을 여행한 새도 알지 못한 세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미래이다. 이 미래가 의식의 도움으로 순간 속으로 옮겨질 때, 새에게 알려지지 않는 염려가 발견된다. 새가 아무리 멀리 날아가고 아무리 먼 곳에서 날아와도, 새는 결코 미래로 날아가지 못하고 미래로부터 결코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은 의식할 수 있으므로, 그의 마음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이 언제나 서로 접촉하는 장소다. 거기서 영원한 것은 시간으로 침투한다. 시간은 사람에게 긴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신의 의식 속에 영원한 것을 지녔고 영원한 것으로 순간들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새가 알지 못하는 위험한 적을 사람이 갖고 있는 이유이다.
시간이 적(敵)이다. 그래, 시간은 적이거나 친구다. 사람은 시간의 추격과 시간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의식 속에 영원한 것을 갖고 있고 그러므로 시간을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의 고귀성에 대한 은폐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높이 올리신 만큼, 또한 그만큼 낮게 억누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억눌리게 되는 것은 또한 높이 올라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의식 속에 있는 영원의 도움으로 새보다도 더 높이 사람을 올리셨다. 그때 말하자면,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새가 알지 못하는 걱정, 비천하고 지상적인 걱정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새보다도 더 아래로 그를 억누르신 것이다.
오, 새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상한가! 그러나 그런 염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훨씬 더욱 아름다운가!
그러므로 사람은 확실히 새로부터 배울 수 있고 실제로 새를 선생이라 부른다.
그러나 최고의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새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없는 것처럼, 역시 아이도 그렇다. 아, 그러나 누가 기꺼이 아이에게 배우고 싶어 하겠는가!
사람이 염려하는 중에 그를 낙담시키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의욕을 꺾은 것이 실제적인 궁핍 혹은 상상의 궁핍일 때 바로 그때 그는 구원을 간절히 찾고, 아이로부터 간절히 배우기를 바라고, 남몰래 배우기를 열망한다.
그는 아이를 그의 선생이라고 부를 만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말하기 시작하고 선생으로서 말한다면, 틀림없이 어른은 말할 것이다.
"그래, 아가야, 그런데 이것은 네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있단다."
그래도 아이가 계속 말한다면, 어른은 그를 버릇없는 아이라고 부를 것이며, 아마 그 선생을 공격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진지한 의미에서 어른은 아이의 선생이고 아이는 농담이 섞인 진지함의 아름다운 의미에서만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우,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염려할 수 있는 것이 완전성이다.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사람이 새로부터 배우고 남몰래 배우고 싶어한다 해도, 또한 그를 선생이라고 부를 만큼 감사한 마음이 있다 해도, 단연코 사람은 새보다 뛰어나다.
그때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로운 새는 진실로 우리를 위한 모범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범보다 더욱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의 수업처럼 공중의 새를 가리키며 지도했던 분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분은 진지함과 진리에 있어 실제적인 모범이셨다. 그분은 또한 본질적인 인간의 완전성을 위한 모범이시다.
새는 둥지가 있고 여우는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실 때(마 8:20), 이것은 새보다 더욱 무력한 상태에 대한 것이며 그분은 또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둥지가 없다는 것을 의식할 때, 쉴 곳조차 없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 상황에서 염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진실로, 이것은 고귀한 창조를 위한 거룩한 모범이다. 또한 이것은 사람을 위한 거룩한 모범이다.
새에게는 이런 모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이런 모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성이다. 이것이 사실 아닌가?
우리는 정말로 더 나약한 여성이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것이 여성의 완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죄수가 밖에 나갈 수 없고 그의 삶을 모험할 수 없다는 것이 죄수의 완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위험을 알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잠자는 자의 완전성인가?
혹은, 높이 올리신 분을 감히 우리의 모범이라고 부르는 일로부터 제외하는 것, 우리는 과연 이것을 완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 우리는 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에 관해서는 다르게 말하는가? 우리는 왜 여자가 더 운이 좋은 것처럼 말하는가? 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자는 남편이니까?
우리는 왜 죄수를 운이 좋은 것처럼 말하는가? 국가가 그를 보살펴 주니까? 우리는 왜 잠을 자는 자를 운이 좋은 것처럼 말하는가? 그가 부자가 된 것을 꿈꾸고 있으니까?
그의 재물 때문에 사람 되신 하나님을 자신의 모범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외된 자, 도대체 우리가 이 사람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운이 좋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저 밖에, 새와 함께하고 있는 염려하는 자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그는 새를 돌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상상의 염려를 완전히 망각한다.
그 순간 그는 심지어 실제적인 궁핍도 망각한다. 그의 마음은 평온하다. 진실로, 그래서 그는 덕을 세운다. 그러나 새가 만일 가르치려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아마도 대답했을 것이다.
"내 작은 친구여, 여기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있단다."
다시 말해, 그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할 수 있는 것에 어떤 완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