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를 만나다] 일의 완전성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마 6:26)."
이 말씀은 새가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완전한가? 잠이 밤 시간을 도둑질하듯이, 같은 방식으로 낮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 완전성인가!
새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일찍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새는 잠을 자고 깨어있는 것조차 꿈이다.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노래도 불행한 사랑에 대한 꿈일 뿐이니까. 따라서 행복한 농담이든, 슬픈 농담이든, 새는 잠을 자고 있고 평생을 꿈을 꾸며 보낸다. 동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가? 남자가 매일 일터에 있는 것처럼, 아이가 놀이터에서 매일 놀다 지쳐버리는 것, 그리고 꿈을 꾸며 다시 노는 것, 이것이 아이의 완전성인가? 그런 아이는 사랑스럽다. 아, 그러나 누가 아이에게 기쁘게 배우겠는가!
이따금 어른이 일을 하고 있지만 일에서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래, 아마도 짜증이 난다면 아, 그때 그는 간절히 아이 옆에서 평온해지고 싶어한다. 간절히 아이에게서 배우고 싶어한다. 그는 그렇게 남몰래 열망한다. 아이를 선생이라고 부를 만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선생을 꾸짖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어른은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진지한 의미에서 어른은 아이의 선생이고 아이는 농담이 섞인 진지함의 아름다운 의미에서만 어른의 선생이기 때문이다.
새는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새의 삶은 무의미하다. 천진난만한 새는 그의 삶을 헛되게 한다. 이것은 정말로 완전한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불완전성인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곤경의 때에, 새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서 굶어 죽는 것, 멍하게 있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새 편에서의 완전성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선원이 폭풍 속에서 배에 누워 문제를 방치할 때, 그가 할 일을 아무것도 모를 때, 우리는 그것을 그의 완전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맹한 선원이 배를 조정하는 법을 알 때, 그가 그의 창의력으로, 그의 힘으로, 그의 인내로, 폭풍에 맞서 일할 때, 그가 위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스스로 일할 때,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
우리는 매우 나태하게 살면서 오전에 늦게 일어나는 사람을 본다면, 그가 배고픈 나머지 뜻밖에 음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 일찍 보고 있는 바쁜 노동자를 칭찬한다. 혹은 오히려 우리가 그냥 본 것이 아니고, 아침 일찍 그가 이미 거기에 계속 있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어부는 그의 그물을 돌보고 있었고, 목동은 풀을 뜯기기 위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어부와 목동을 칭찬한다.
일한다는 것은 사람의 완전성이다. 일함으로써, 사람은 또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닮는다. 사람이 그의 음식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어리석게 그가 자기 자신을 돕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더 좋아 한다.
"그는 자신의 음식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고전 3:9). 당신도 알다시피, 새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아니다. 충분히 확실하게 새는 자신의 음식을 얻는다. 그러나 새가 하나님의 동역자는 아니다. 새는 떠돌이가 저 시골에서 그의 생계를 얻듯, 자신의 음식을 얻는다. 그러나 음식을 위해 일하는 종은 집 주인에 의해 동역자로 불린다.
새는 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는 음식을 얻는다. 이것은 새의 완전성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음식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복음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하나님께서 새를 예외로 여겼을 때, 그 이유는 가난한 새는 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가난한 새는 일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완전성에 대해 말하는 방식인가? 그때 일한다는 것이 완전성이다.
사람들이 비참하게 서술하듯,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극심한 궁핍이 아니다. 오, 그런 것이 아니다. 평생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완전성이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가 있고 그들이 죽고 난 후 당신을 남겨 놓을 때가 있으므로, 자녀를 돌보아야 할 부모가 언제나 있지 않다는 것이 완전성이다.
극심한 궁핍, 말하자면, 이것은 특별히 사람의 완전성으로 인식되는 바, 일하는 것이 완전성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자, 그러므로 기쁘게 일하러 가기를 거부하는 자를 굴복시키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소위 극심한 궁핍이 없더라도, 사람이 일하기를 중단하는 것은 여전히 불완전성일 것이다.
왕이 수여하는 영광스러운 훈장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영광으로 훈장을 목에 걸고, 어떤 사람은 훈장을 목에 걸기 때문에 훈장을 영광스러워 한다는 말이 전해진다. 우리가 이에 대해 위대한 하나의 예를 들기 원한다. 그는 실제로 일을 존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예이다.
그는 확실히 사도 바울이다. 하루의 길이가 두 배가 되기를 바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확실히 사도 바울이다. 많은 사람을 위해 매 시간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확실히 사도 바울이다. 교인들에 의해 쉽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확실히 사도 바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행 18:3, 20:34). 그가 채찍질 당하고, 핍박과 모욕을 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한 것처럼, 그가 사슬에 매이는 영광을 자랑했던 것처럼, 그는 또한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사도적인 겸손으로, 그는 감히 복음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복음을 전하면서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고전 9:18). 나는 사도가 된 후, 돈과 결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광이다. 그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하여 감히 담대하게 말한다.
"나는 인생이 어떤 어려움에서 면제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또한 나의 손으로 일하는 영광을 갖고 있으므로, 내가 특별대우를 통한 어떤 유익에서 배제된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광이다.
아, 세상적인 비교의 절망적이고, 눈부시고, 불행한 비참함이 있는 곳에, 진정한 영광도 아니고 진정한 완전성도 아닌 지식이 있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말한다. 그들은 비겁하게 기만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저 밖에, 새와 함께 있는 염려하는 자는 일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그리하여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은 재물을 위해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은 풍부함을 쌓기 위해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가난을 막기 위해 일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새가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때 새와의 기분전환을 통해, 염려하는 자는 그의 염려로부터 생각할 만한 상당히 다른 무엇인가를 획득한다. 그는 일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올바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하는 중에 다시 이것을 망각한다면, 아, 그때 저 사랑스런 선생인 새가 그의 옆을 날아가면서 그가 망각했던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가 새를 보기만 한다면.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