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페미니스트 문화현상(下)
‘혜화역 시위’나 페이스북 사옥 앞 불꽃페미액션의 ‘여성 상의 탈의’ 시위 등 페미니즘 이슈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박욱주 교수님의 페미니즘 관련 두 번째 특별기고를 지난 주에 이어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페미니즘과 젠더: 여성 없는 페미니즘?
은하선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한국의 통속화된 페미니즘은 지극히 협소한 범위 내의 자극적 주제들을 페미니즘 대표 논제로 제시하는 데 열중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젠더(gender)' 개념을 위시한 성적 정체성 이념의 해체다.
여성성을 가부장적 억압의 산물로 보고 전통적인 성별 관념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이미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출간되던 시기부터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특별히 새롭다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보부아르의 주장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전통적인 성관계 양태 및 가족구성 양태의 해체를 시도하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저명한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를 지목할 수 있다. 버틀러는 UC버클리 비교문학 교수로, 현대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가 1990년 집필한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버틀러를 오늘날 페미니즘의 대표주자이자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리는 데 가장 크게 공헌했다. 이 저서에서 그녀는 '섹스(신체적, 생물학적 성별)'와 '젠더(자기의 정신적 성 정체성)'의 개념적 차이를 구분하고, 단순하게 남-녀로만 나뉘는 섹스의 개념은 인간의 다양한 성 정체성을 담아내는 데 적합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그녀는 획일적으로 객관화된 남-녀의 성별 관념을 해체하고, 각 개별인격이 각자의 삶의 정황에 맞게 형성한 성 정체성을 각 사람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성, 즉 '젠더'로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성적 소수자들의 '젠더'가 각 사람의 진정한 성 정체성으로 인정받아야 하며, LGBT로 대변되는 모든 양태의 성 정체성이 그 자체로 삶의 개별성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젠더 트러블>은 버틀러 자신의 성 정체성을 변호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녀는 동성애자로서 같은 학교 교수이자 정치학자인 웬디 브라운과 20년 가까이 동거 중이며, 브라운이 버틀러를 만나기 전 낳은 자식을 함께 키우고 있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기점으로 페미니즘 운동은 강력한 동맹군을 얻게 된다. 온갖 종류의 성소수자들이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천막 아래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양상에도 근본적 변화가 발생한다.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이 주로 '여성'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종교적 권리 신장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젠더 트러블> 출간 후 페미니즘 운동은 주로 전통적 성관계 양태 및 가족구성 양태의 해체를 여성 인권 신장의 지상명령으로 내세운다.
'젠더' 개념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후, 페미니즘 운동의 저변이 크게 확대된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진영을 형성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동성결혼 합법화는 대표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성이라는 자극적 주제와 깊게 연관된 '젠더' 개념은 일반인들의 관심과 지지를 불러모으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었고, 페미니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문제는 <젠더 트러블>의 인기에 힘입어 페미니즘과 혼합된 자의적 성 정체성 의식과 퀴어 이론이, 원래 페미니즘이 힘써 개선하고자 했던 문제들을 망각하게 하는 주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기존 페미니즘 운동은 제3세계 여성들의 가정 및 촌락 내 인권 문제, 육아 및 가사부담 편중으로 인한 구조적 억압 문제, 경제활동 및 사회활동 중 직면하는 고질적인 부당차별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하면서 대안과 해법을 제시하려 힘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중의 인식 속에는 '페미니즘=젠더 해방'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원래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하고자 했던 방향성이 퇴색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수의 여성들에게 돌아가는 중이다. 페미니즘의 목적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젠더 해방으로 고착되면서, 여성들의 실질적인 인권 신장 및 차별 철폐 등은 이른바 해묵은 문제 취급을 받게 되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상황이 시작됐다.
페미니즘 운동이 축적해 온 사회적 영향력과 정치적 역량이 페미니즘 본연의 목적과 별반 관계가 없는 '젠더 해방'에 집중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소수와 약자: 소수라서 약자인가?
"소수는 약자다." 젠더 해방을 부르짖는 이들의 공통 논리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 '섹스'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신종 '젠더'들의 수는 당연하게도 소수다. 이는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 '여성'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주체는 첫째로 '여성'이고, 둘째로 '남성'이다. 궁극적으로 페미니즘은 남녀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지배가 아닌, 상호존중과 조화의 삶을 꿈꾼다.
그런데 이런 페미니즘의 이상에 '젠더 해방'이라는 이념이 개입되면서, 페미니즘의 논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전통적 남녀관계에서 문제가 된 점은 통상 남녀의 인구 수가 거의 엇비슷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일방적으로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문화적·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성을 부당하게 억압받는 '약자'로 부를 수는 있었어도, '소수'로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젠더 해방 이론이 페미니즘에 결부되면서 '약자'로서의 여성은 사라지고, '소수'로서 젠더들만 남게 된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 및 수혜자의 범주가 여성 전체가 아니라 소수 젠더들에 국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행정학에서 정책을 분류할 때는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기준을 따르기 마련인데, 특별히 자주 채택되는 분류법으로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의 정책 분류법이 있다. 윌슨은 어떤 정책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 이익의 분산 및 집중 여부를 따라 정책을 분류했다.
윌슨이 분류한 정책유형 가운데는 '고객의 정치(client politics)'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정책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은 다수가 부담하고, 그 편익은 소수가 향유하는 정책 유형을 의미한다. 이때 비용을 부담하는 다수는 그 비용 부담 정도가 적극적인 실력 행사에 나설 만큼 크지 않아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집결할 구심점이 부족한 까닭에, 통상 해당 유형의 정책에 별 저항 없이 순응하게 된다.
현재 젠더 해방 운동에 경도된 통속적 페미니즘 운동을 바라보면, 내부적으로 '고객의 정치' 원리가 지배적으로 통용됨을 목격할 수 있다. 젠더 해방을 부르짖는 소수는 자신들의 성 정체성, 성행위 방식, 가족구성 방식을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데 사활을 건다. 이들의 결집력은 왠만한 종교 교파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반면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거나 동조하는 다수는 일상화되다 못해 해묵은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를 부르짖는 데 지쳐 뚜렷한 응집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의 주도권 교체: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은 없다
이에 페미니즘 운동의 주도권은 점차 젠더 해방을 부르짖는 LGBT 성소수자들에게 넘어가고 있는 추세다. 젠더 해방을 꿈꾸는 성소수자들은 다수 여성들이 누려할 할 정치적 편익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는 데 유리한 입장에 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더할나위 없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퀴어 행사 대부분이 대단히 자극적이면서도 공개적인 양상을 띠는 이유는,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곧 페미니즘 운동의 테두리 안에서 성소수자들의 지분을 늘릴 수 있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표 사례로 서울광장 퀴어 행사를 들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퀴어 운동 관련 행사들은 향후 더 자극적이고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정황 속에서 통속적인 페미니즘 운동은 점차 다수의 '약자'를 위한 운동에서, 힘있는 '소수'를 위한 운동으로 변질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페미니즘 내부의 젠더 해방 운동가들은 '소수라서 약자'라는 논리를 고수하지만, 정책적이고 정략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그들은 이미 '소수의 약자'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자'들이다.
인간 개개인의 완전한 평등을 이상으로 내세우는 젠더 해방 운동가들이 페미니즘 운동의 범주 내에서 전략적으로 계급화를 주도한다는 사실, 참으로 모순적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당연해 보인다. 이런 내적 이율배반은 이미 구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질리도록 목격해 온 바다.
이런 계급화를 초래하는 원인은 결국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과 '소수 젠더를 위한' 페미니즘 간 결집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 운동은 상당한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그로부터 얻는 성과 및 성취감이 크지 않다. 지극히 일상화되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관습적 행태들에 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득권을 붙잡고 있는 남성들의 저항까지 감내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여성을 위한다'는 모토가 워낙 진부해져버린 터라, 남성들은 물론이고 여성들조차 관심을 갖고 동참하기를 꺼려한다. 그나마 '미투 운동'처럼 고위공직자나 인기 연예인의 비위가 결부돼야 비로소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 정도다. 그리고 그조차 시간이 경과되면 '미투 극장'으로 변질되는 것이 일상사다.
반면 '소수 젠더를 위한'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그들의 인내와 희생에 비교적 즉각적으로 보상을 받는다. 일단 성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용이하다. 그리고 정치인, 기업인, 예술인, 인기 연예인 등 대중의 관심과 선망을 받는 이들 가운데 성소수자 비율이 비교적 높아, 대중의 거부감을 불식시키기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성 정체성 변호를 통해 그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한 편익을 획득한다. 바로 자신들의 성적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데서 얻는 편익이다.
성소수자들의 최고 고충 가운데 하나는 성적 호감을 표현할 때 흔히 당하게 되는 격렬한 거부반응이다. 소수 젠더에 대한 거부감 불식은 이런 문제에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 거부감을 차별과 연결시키는 데 성공하는 경우 더할 나위 없는 반격의 기회를 얻는다.
페미니즘은 바로 여기에 봉사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젠더 차별이 부당한 인종 차별이나 여성 차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줌으로써 젠더 해방의 정당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처럼 젠더 해방 이념은 여러 면에서 페미니즘과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전자는 강력한 결집력을 가진 힘있는 '소수'를 위한 운동원리인 반면, 후자는 결집이 쉽지 않은 약자로서의 '다수'를 위한 운동원리다.
젠더 해방 이념이 본질적으로 편익 증대를 위해 동조자의 수를 늘리는 확장적 성격을 갖는 반면, 페미니즘은 이미 인류의 반수를 차치하고 있는 고정된 숫자의 여성들에게 각성을 요청하는 반성적·성찰적 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상이한 성격을 가진 두 이념을 절묘하게 하나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출중한 철학적 역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철학적 역량의 출중함 여부와 무관하게, 현재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벌어지는 교묘한 계급화 및 '고객의 정치' 양상은 그녀의 사상의 진의, 그리고 페미니즘과 연합한 (혹은 페미니즘의 탈을 쓴) 젠더 해방론자들의 의도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본다면, 여성의 참된 해방을 통해 주의 여종이 될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합당한 '인간'이 될 자유를 수여하는 일은 고결하다.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즘은 기독교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자의적 성 정체성인 젠더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변질된 상황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신앙의 입장 여부를 떠나서라도, 자신들의 편익 확대를 위해 다수 여성들의 권리 옹호를 뒷전으로 미루고 페미니즘의 사적 이용 가치만을 따지는 페미니즘 운동 내 성소수자들의 젠더 해방운동 행태는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