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친동성애 정치인이 대거 재등용된 이유
민주주의의 종말.
아침에 문득 '민주주의의 종말'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장-마리 게노(Jean-Marie Guéhenno)라는 프랑스인이 쓴 작품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시절 평화유지 담당 차관으로 임명되었던 그가 임관하기 7년 전에 집필한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는 무려 25년 전에 나온 책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이 책의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해를 '민주주의의 종말'로 선언하다니. 이 책이 과연 당시에 어필이 되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강력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이 시각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은 ①국민국가의 종말 ②정치의 종말 ③세계는 레바논화될 것인가? ④황제 없는 제국 ⑤보이지 않는 사슬 ⑥불가피해진 추종주의 ⑦신이 없는 종교들 ⑧황금 송아지 등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25년만에 다시 꺼내든 이 제목과 목차는 우리나라 현재 상황에 딱 들어맞는 구성인데, 왜 딱 들어맞는다는 것인지 재구성하겠다.
1. 국민국가의 종말
이 책의 저자가 "민주주의는 서기 2000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서막으로 포문을 연 시점은 공산주의 진영이 최종 붕괴되는 시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보고 이 책을 집필했다고 했으니까.
정작 '공산주의의 종말'을 고해야 할 시점에 어찌하여 '민주주의의 종말'을 고한 것일까?
히틀러를 무찌르고 얻은 승리는 스탈린의 도움을 받아 얻은 반쪽짜리 승리였다는 사실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반쪽짜리 승리가 결국에는 유럽의 절반을 공산주의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것이다.
다행히 1989년 미국과 소련이 몰타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하고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지만, 결국 그것은 공산주의의 종말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다름 아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종말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의 종식이라는 두 번째 이유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보수의 종말은 5·16 혁명(혹은 쿠데타)의 종식이라기보다는, 동학혁명(혹은 란(亂))의 종식이라 할 수 있겠다.
2. 정치의 종말
저자는 민주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도래한 '국민국가의 종말'을 세계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영토적 국가 개념의 붕괴로 보았는데, 이 국민국가의 종말은 곧 정치의 종말이라 선언한다.
연대의식과 보편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던 공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사적 이익의 보호를 대변하는 미국 시스템이 대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사익 시스템 속에서 토론은 연속성을 상실하고 원칙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언제나 상황 속에만 갇히게 되어, 결국 토론의 본질은 사라지고 마는 행태를 정치의 종말로 지적한다.
이러한 정치 실종의 시스템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서 작동한지 오래다. 정작 미국 자신은 나름대로 합리성이라도 고수하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공익을 가장한 사익 시스템으로 변종된 이 시스템에서는 토론의 본질이 사라진지 오래다.
정치의 실종, 엄밀히 말하면 '의회 정치'의 실종이다. 가령 정당 및 정치인들은 우리네 본성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친동성애 법안들을 공익을 가장한 정치적 사익 속에서 상황화의 마술을 거처 입법화로 직행시킨다. 토론의 본질이 있을 리 없다.
친동성애를 지지하는 정치인이 대거 재등용된 결과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3. 세계는 레바논화될 것인가?
레바논은 오랜 기간 살육의 세월을 보낸 지명을 상징한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이해와 이념의 정거장인 레바논은 동질의 집단으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집단적인 자살을 저질렀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공동체간의 권력 분배 논리와 국민 주권의 논리 간에 존재했던 절충적 형태의 정치는, 이해관계 속에 버티지 못하고 분열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의 속성으로서의 레바논화가, 대한민국이라는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전개된지 오래다. 어떤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없는 풍토가 바로 그것이다. 적폐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광화문의 노란 리본이 지나치게 오래 전시되고 있다고 우리는 말하지 못한다.
4. 황제 없는 제국
저자는 당시 유럽공동체(EC)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것 같다. 유럽공동체를 선호하는 이들을 '연방주의자'라 부르는 그는, 연방주의 성원들이 스스로 국가 주권의 영역을 포기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실상 그의 예언 이래 25년이 흐른 지금, 영국은 이 연방에서 탈출한 상태이다. 언론은 영국의 즉각적 종말을 예고했지만, 지금까지 영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동구권에 이어 서방은 연방을 해체하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는 도리어 연방의 길을 밟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민주주의의 종말이기도 한 것이다.
5. 보이지 않는 사슬
규칙의 세계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원칙이 없는 세계 속에서 힘은 어떻게 제한될 수 있는가?
저자는 자유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정의한다. 첫째는 인간 집단에 있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 다시 말해 자기 집단 공통의 의지를 표현할 정부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둘째는 개인에 있어 권력 남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 즉 소수파가 다수파에 의해 짓밟히지 않을 보장성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서의 자유에 관한 역학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 '법'의 조율 기능이기도 하다. 민사와 형사에는 능한데, 조율 기능은 상실한 법 체계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6. 불가피해진 추종주의
저자는 목표가 없고 의미가 없는 사회 속에서 '사회 메시지'는 결국 관계에 대한 개념으로 귀결되고, 또한 그 관계는 철저하게도 뜻이 없고, 그런 만큼 무한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형국에 놓인다고 지적한다.
즉 '법'이 정위 기능을 스스로 상실하니 사회에는 기호(시니피앙)만 남게 되고, 결국에는 해석만이 난무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입자들에 대한 프로그래밍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 '해석의 난무'로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중 영화에 적재된 스토리텔링의 오남용이다.
역사를 텍스트에서 탐문하지 않고 가공된 비주얼로 개정시키려는 시도의 이 프로그래밍이 추종주의를 낳았고, 결국에는 도덕적 추문에 휩싸인 지자체 단체장에게도 가편 투표를 안 하면 안 되는 추종주의로 나타났다.
7. 신이 없는 종교들
로마 공화국은 미래의 기독교를 탄생시키게 될 종교적 분위기가 싹트는 즉시 멸망했다. 이것은 정치 영역을 종교적 근원에서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오늘날에는 정치의 독립성 때문에 그 정치 자신이 죽어간다고 저자는 힐난한다.
신들이 먼저 사라졌고 그 다음 정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놀라운 통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종교, 특히 기독교 역시 무신론이다. 미래의 연방 국가를 탄생시키게 될 이 종교적 분위기가 싹트는 즉시, 기독교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친동성애 관료에게 가편 투표를 서슴치 않기 때문이다. 실명도 공개 안 하면서 말이다.
8. 황금 송아지
저자에 따르면 국가란 공익의 수탁자로서의 임무를 맡음으로써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국가는 그 권위를 잃어버렸다. 국가는 돈의 세계적 순환에 의해 추월당하고, 국가보다 더 강력한 이익집단들에 의해 농간당하고 있다.
그렇게 옹색하고 보잘 것 없어진 국민국가는 오로지 그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힘을 잔존시키기 위해 부패를 비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돈에 얽힌 '추문'이 증가하는 것은 결국 비정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소 비도덕적인 사회 감시단체 출신 내수형 NGO들이 권력의 요직에 오르는 순환 관계 속에서 이 '황금 송아지'를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의 종말'이 임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기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