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2) 자기 부인
주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렇다면 십자기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의미를 더 면밀히 살피기 위해 부자 청년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어느 날 부자 청년은 주님을 만나러 온다. 그리고 주님께 묻는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왜 선한 일을 내게 묻는가?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시니 부자 청년은 주님께 다시 묻는다. "어느 계명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이 청년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며 말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아마 오늘 날 우리 같았다면, 이 청년을 칭찬하며 말했을 것이다. "대단한 청년이구나. 이 청년처럼 살아라. 그러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오늘부터 나를 따르라."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달랐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네가 완전해지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결국, 청년은 근심하다가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증언이다.
한 번 가정해보자. 만약 이 청년이 재물을 다 팔았다 치자.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세상의 판단은 어땠을까? 먼저 세상의 판단부터 살펴보자.
오늘날 정말로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전 재산을 다 바친 청년이 있다면, 세상은 이 청년을 존경할 것인가? 아마 존경은커녕,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를 괴짜로 비웃거나 어리석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마 그의 부모가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대성통곡을 할지도 모를 일이고 당장에 그를 잡아와 정신병원 의사의 감정을 받아 '그가 미쳐서 그랬으니 재산을 도로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미친 짓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제 이 요구 조건대로 청년이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의 선한 행동, 하나의 고상한 결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 세상에서 배운 것이다. 세상에서는 어쩌다 행한 하나의 작은 선한 행동만 봐도 놀란다. 왜냐하면 그런 일도 세상에서는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까지 부른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게 가르친다. 재산을 파는 것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혹은 기껏해야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좋은 시작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첫 번째 단계다. 즉, 이것은 십자가를 떠맡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지속적으로 행해야 하는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곧, 다음 단계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 청년이 한 번에 재산을 다 팔았다 해서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가가 되기 위해서 그런 일은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여기에 "날마다"라는 단어를 추가한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또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모든 이기심에 대하여 죽지 않는 한, 이 세상에 대하여 날마다 죽지 않는 한,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아마 여러분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이런 요구조건이 너무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주님께서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단돈 천 원 정도를 요구했다고 가정해보자. 부자 청년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재산이 많은 부자 청년에게 단 돈 천 원을 요구하는 것, 그에게 아주 보잘것없는 일로 보이는 것을 요구하는 것, 이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참나, 별꼴 다 보겠군. 당신을 따르는 일은 아주 쉽군요. 하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싫습니다.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나 불러서 제자 삼으시죠."
아마 청년의 반응은 대충 이랬을 것이다. 결국, 이 청년은 사소한 일에서 자기 부인한다는 것도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이때 자기 부인이란 겸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소한 일에서 자기 부인하는 일도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는 독자, 당신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가? 당신은 고상한 자기 부인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자기 부인을 한 일이 있는가? 기독교의 요구가 너무 가혹한가?
그러나 요구조건이 시시할수록, 더 작을수록, 더 하찮을수록,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모욕감은 더욱 증폭된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의 찬양을 빼앗는다. 이때, 겸손은 곧 자기 부인이고, 과연 이 요구조건은 가혹했는가? 당신은 어떤 자기 부인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처럼, 마치 외딴 곳에 있는 것처럼 산다면, 도대체 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가? 당신은 왜 누군가의 칭찬을 듣는다면, 자기 부인이 더 쉬운가?
그러나 자기 부인은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없다. 많은 것을 요구했든, 작은 것을 요구했든 상황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람이 그의 상황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거의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이런 점에서는 거지도 무조건적으로 왕만큼이나 자기를 부인할 수 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