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난민 신청자들을 철저하게 검증하길 촉구”
중동 E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해 온 A선교사가 제주에서의 대규모 예멘인 난민 신청 사태에 우려하며 "철저한 검증"을 강력히 촉구했다. A선교사는 9일 기고를 통해 "이슬람은 공존의 종교가 아니라 지배와 통제의 종교이며, 배타적 종교이고, 집단적 게토를 만드는 종교"라며 "그들이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한 절대로 기존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게토 그룹을 만들고, 기존의 사회를 변화시키려 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A선교사는 특히 "어떤 종교의 본질은 그 종교의 창시자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경전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며 "이슬람의 본질은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하디스와 무함마드의 전기 책 등의 이슬람 원전에서 발견되는데, 연구할수록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은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윤리적인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수많은 무슬림이 이슬람의 혐오스러운 본질에 치를 떨며 이슬람을 탈출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A선교사는 자신의 무슬림에 대한 시각이 치우쳐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무슬림이 들어오면 이슬람이 들어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이슬람은 절대로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무슬림의 대부분인 온건주의 무슬림도 이슬람을 실천하면 할수록 본질적 속성을 쫓아가게 돼 있으므로 이슬람의 한국 진출은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무슬림 관광과 단기 체류는 막을 수 없으나 한국 사회에 한국인 국적의 무슬림 공동체가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우리의 이민 정책 모델도 이민 가는 사회에 충실하게 동화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기고 전문.
이슬람의 한국 진출을 막아야 할 이유
한국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노동력 부족 등으로 인한 예견된 결과이다. 그런 가운데 중동의 내전 당사국에서 발생한 난민이 한국에 들이닥쳤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딜레마에 빠져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한다. 맞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점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외국인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섬겨야 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난민이 공식적으로 허락될 경우 앞으로 사회적 위험 요소가 많아지기에 극히 우려스럽다.
지금도 한국 사회는 좌파와 우파 대립, 혹은 노동자와 재벌 대립 등 여러 가지 갈등의 요소가 있다. 그런데 만일 무슬림 이민자가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그들의 숫자가 늘어가게 되면 한국 사회는 기존의 사회적 갈등 요소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적 갈등 요소가 될 것이다. 난민 문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1. 현재의 예멘 난민의 문제는 '난민'의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의 문제이다.
예멘 난민이 뜨거운 감자이다. 사람들은 예멘 난민 혹은 중동의 난민들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인도주의적 '난민'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하면 종교 차별이라 할 것이다. 그런 역풍을 맞지 않기 위해 지혜롭게 접근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내면적 시각과 관점에서 이슬람 종교의 문제로 바라보고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만일 그들이 예멘이나 시리아 등 이슬람 국가에서 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민감하지 않을 것이고 안티 반응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안티 반응은 이슬람 종교 안에 존재하는 폭력성과 비현대성 등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사작용이다. IS 등의 극단주의자들이 중동과 유럽 등지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본 학습효과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슬람 종교의 문제인 것이다.
2. '이슬람의 본질'을 알고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이 문제가 '난민'의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의 문제이기에 우리는 이슬람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혹자는 이슬람은 그런 폭력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무슬림은 IS 등의 극단적인 활동에 대해 "그것은 이슬람 종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하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것을 거짓으로 꾸며서 말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이야기한 것으로 본다. 그들은 현대적 온건 이슬람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가르침 하에서는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이다. 그 가르침에는 많은 서구적 가치관이 혼합되어 있기에 그들이 믿는 이슬람은 IS가 실행하는 이슬람과 다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현대적 온건 이슬람이 아니라 본질적 이슬람 즉 이슬람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본질'이 무엇인가? 무엇을 두고 그들의 원초적 모습이 그것이라 할 수 있는가? 어떤 종교의 본질은 그 종교의 창시자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경전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그 종교의 초대 제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슬람 종교의 본질은 창시자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 꾸란의 가르침, 그리고 초대 칼리프 시대 지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필자가 말하는 '이슬람의 본질'은 오늘날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고 주장하는 쉐이커나 수많은 선남선녀 무슬림에서 찾을 수 없다. 꾸란의 평화로운 메시지 몇 구절을 들이대며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국내의 친이슬람 학자들로부터 찾을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이슬람은 지난 1400년 동안 영웅시되고 미화된 이슬람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가 말하는 '이슬람의 본질'은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하디스와 무함마드의 전기 책 등의 이슬람 원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의 중심지 아랍권에서 아랍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는 이슬람의 팩트(Fact)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지난 1400년 동안 가리워졌고 통제되었던 이슬람의 치부들이 인터넷과 SNS 등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밝혀지는 것이다.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수많은 무슬림이 이슬람의 혐오스러운 본질에 치를 떨며 이슬람을 탈출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을 연구하면 할수록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이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윤리적인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부분을 살펴보면 볼수록 이슬람이란 종교는 현대인의 가치관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이런 내용은 아랍권 SNS 그룹에서 수많이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유튜브 '이슬람의 상자'와 '라쉬드 형제 TV' 등에서 말하고 있고, 영어로도 Ex(탈) 무슬림들이 운영하는 SNS 그룹들에서 말하고 있다. 필자는 하미드 박사가 진행하는 '이슬람의 상자' 유튜브 강의를 경청해 보길 권한다. 하미드 박사는 이집트인으로서 이슬람 배경의 무신론자이다. 이슬람의 본질을 잘 설명하고 있다.)
본질적인 이슬람의 측면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이슬람의 특징을 소개한다.
1.이슬람은 공존의 종교가 아니라 지배와 통제의 종교이다.
오늘날 현대의 온건 이슬람은 이슬람이 평화와 공존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질적 이슬람은 타종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다. 본질적 이슬람은 끊임없이 정치적 술수와 선동, 회유와 통제 등을 동원하여 이슬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때로는 폭력과 테러를 동원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 예들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나 IS나 알카에다 등의 역사를 통해서 명백히 볼 수 있고 현재 영국 등 유럽에서 무슬림이 진출한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슬람이 국가의 종교(State Religion)로 채택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짐미 백성인 2등 시민으로 박해받으며 살아갈 때까지 그들은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할 것이다.
2. 이슬람은 배타적 종교이다.
이슬람의 배타성의 극치는 무슬림이 이슬람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한 번 무슬림이 된 사람이 이슬람을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이슬람 종교를 떠나는 것을 '릿다'라 한다. 그 '릿다'의 죄를 범한 사람의 대가는 죽음이다. "종교를 바꾸는 사람을 죽여라."(하디스 부카리 2794번) 원리주의 무슬림은 이 내용을 공공연하게 말한다.
이슬람 역사는 피의 정복의 역사가 한 단면이고, 다른 한 단면은 이슬람을 떠나는 사람에 대한 '릿다'의 전쟁과 살해의 역사가 한 단면이다.(시아파 지도자 이야드 자말 앗딘의 말) 아부 바크르가 수행한 릿다 전쟁에서부터 1400년 동안의 역사가 그러하다. 실수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잘못 말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더라도 그 이슬람을 떠나는 사람은 죽음으로 다스렸다.
3.이슬람은 집단적 게토를 만드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이고, 이슬람 공동체가 우선이다. 무슬림이 다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충실하게 산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 사회에 동화된다면 우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무슬림으로 살아가는 한 그들은 기존의 사회와 물과 기름이다. 그들은 절대로 기존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게토 그룹을 만든다. 그리고는 기존의 사회를 변화시키려 든다. 이슬람의 가치가 기존 사회의 가치보다 우선이 될 것이고, 기존 사회와 분리되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유럽 나라들에서 무슬림 난민의 경우를 보더라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반면 교사로 활용할 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이슬람의 한국 진출을 막아야 한다. 가능한 한 막아야 한다. 무슬림이 한국에 관광을 오고 단기 체류를 하는 것 등은 막을 수가 없다. 그렇게 들어 온 무슬림을 박대할 것이 아니라 환대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한국인 국적의 무슬림 공동체가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이슬람은 경계할 대상이지만 무슬림은 사랑할 대상으로 믿는다.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이슬람과 무슬림을 구분하지 않지만 우리는 구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모든 무슬림은 나쁜 사람이 되며 그들과 관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분할 때에 그들에 대해 올바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그들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손님과 친구로 맞아서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개인으로서 무슬림을 대하는 것과 법적이나 조직적으로 대하는 것이 달라야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지난 세기 유럽 여러 나라의 아메리카 신대륙 이주민이나, 동유럽 이주민이 서유럽으로 이주하는 경우 그들이 이민 가는 사회에 충실하게 동화되었다. 우리의 이민 정책의 모델도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케이스들을 선택적으로 받아야 한다.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한 이민자를 동남아의 불교국이나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받아야 한다. 또한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을 받더라도 Ex 무슬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민 심사와 난민 심사에 이런 부분이 반영되어야 한다.
혹자는 필자가 바라보는 이슬람에 대한 관이나 무슬림에 대한 관이 지나치게 이슬람 원리주의에 치우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동남아나 터키나 동유럽의 무슬림은 그렇지 않고 온건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무슬림이 들어오면 이슬람이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슬람은 절대로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꾸란과 무함마드의 순나(행실과 말)는 신성한 것이고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내용이다. 그들은 지난 1400년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이슬람의 만행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진정한 이슬람을 믿으려 하는 사람은 나라나 지역을 불문하고 이슬람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 주위에서 만나는 무슬림 대부분은 온건주의 무슬림이지만 그들이 이슬람을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면 할수록 그들은 이슬람의 본질적 속성을 좇아가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무슬림이 온건주의자이기에 그들의 주장하는 내용이 올바른 이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본질은 숫자를 초월하며 모든 상황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에 이슬람이 들어와서 커지면 커질수록 부정적 사회병리 현상이 많이 발생할 것이고, 그 결과는 생태 파괴종이 생태계를 교란하고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슬람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이슬람의 한국 진출을 막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미 들어와 있는 무슬림이 있다면 그들을 박대할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을 영향을 끼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중동 E국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