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8) 생각의 도움
기독교는 믿는 자를 이 세상에서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궁핍도, 어떤 비참함도 없는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나타나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삶이 극적으로 바뀌어 형통한 삶이 되는 길로 인도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려고 하면 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이 비진리이기 때문이고, 비정상이 정상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어의 사상은 기독교 안에서도 인기를 얻기 힘들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지고 가야 할 ‘고난’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쉬운 길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려 하면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더 큰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다. 아니, 이 세상 사는 동안은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다. “말구유”는 일종의 그런 상징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번영 신학은 거짓 복음이다. 번영 신학은 자본주의에 물든 기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에게 그 고난을 제거할 수 없는데, 번영 신학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고난과 슬픔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의 ‘고난의 복음’은 오히려 고난으로 초대한다. 복음으로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고난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선택’한 것처럼 자발적인 고난의 선택이다. 복음으로 고난 받기를 선택하는 삶이다. 이 삶에서는 번영이나 세상의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역경이 형통, 번영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기를 선택하는 것, 그래서 세상의 성공과는 아무 관심이 없는 길을 선택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길이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질 수 없는 죄의 짐을 홀로 지셨다. 우리가 죄의 짐을 나누어 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인이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남겨진 부분이 있다면,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걷는 것이다. 제자는 그 스승이 걸었던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분의 멍에를 메는 일이고, 이 삶을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마 11:29-30).”
그러나 주님의 짐은 절대 가볍지 않다. 주님께서 가볍다고 말했으니 가볍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다시 명확히 말해보자. 주님의 짐은 무겁다. 무거운데 가볍다. 말이 되는가?
이 세상에는 짐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있다. 가벼운 짐을 가볍게 지는 방법이 있는 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방법이 있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기술인가? 따라서 복음은 가벼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벼운 짐을 지는 것은 쉽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도 무거운 짐을 지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오늘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동일하게 무겁고도 가벼운 짐에 대한 것이다. 무거운데 가볍다. 그래서 쉽다. 이게 말이 되는가?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구두쇠에게서 배울 수가 있다. 구두쇠는 무겁게 ‘재물의 짐’을 진다. 그는 재물의 짐에 깔려 붕괴 직전에 있을 것 같다. 아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재물의 짐을 모든 사람이 우려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 그에게 물어보라. 그 짐이 무거운가를. 확신컨대, 구두쇠는 재물을 짐으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짐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적이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은 사람들이 추운 바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애인이 물에 빠져 죽어갈 때, 남자는 그녀를 구하기를 바란다. 그 짐은 확실히 가장 무겁다. 그러나 그에게 그 짐이 무거운지 물어보라. 그것은 여전히 서술 불가능한 방식으로 아주 가볍다.
그들 둘은 생명의 위협 가운데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지라도, 그는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한다. 그리하여 생명을 구하기 원한다. 따라서 그는 그 짐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을 것이다. 아마 그 짐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그것은 생각, 사상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그 짐이 무겁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멈춘다. 그때, 어떤 사상, 생각이 들어온다. 그는 말한다.
“아닙니다. 오, 아니지요. 그 짐은 실제로 가볍습니다.”
말이 되는가? 그는 일구이언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진정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랑의 도움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진다. 어찌 보면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은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길을 가는 자는 사랑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랑 때문에 그 짐을 가볍게 지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 짐이 무겁지만 가볍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어느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번영 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고난이 제거된 성공이 더 큰 기적인가, 자발적 고난을 선택하고도 고난 중에 기뻐하는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더 큰 기적인가,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것이 더 큰 기적인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