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9) 산을 옮기는 믿음을 보이려면
사람이 문제가 있을 때, 문제 밖에 서는 것은 어렵다. 밖에 나가면 사고 날 것 같아 집에서 지낸지 10년이 넘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있으면 누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못 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 우울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정신적 질병들은 한 마디로 말해, 문제 밖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오는 질병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들 밖에 설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 내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세계 밖에 설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제 밖에 서야 한다. 문제 속에 있는 한, 문제가 제대로 무엇인지 볼 수 없다. 지구는 둥글다. 지구가 정말로 둥글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지구 밖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옛날에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렛대의 원리를 발명한 사람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세계 밖에 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세계를 움직일 거요.”
그러나 그는 세계를 들어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 밖에 설 수 없었으니까. 아마 그가 세계 밖에 설 수만 있었다면, 지구도 들어올렸을텐데 말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세계 밖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문제를 파헤치고 돌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의 의술이 치료약을 생각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밖에, 문제 밖에 서게 하지는 못한다. 세계 밖에 설 수 있는 방법은 믿음뿐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세계 밖에 서는 운동”이다.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 문제가, 그 고통이 유익하다고 믿으면, 실제로 산을 옮긴다. 실제로. 복음은 말한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믿으라! 그러면 산을 옮길 것이다. 이것은 믿어져야 한다. 그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기뻐할 때, 기쁨을 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중에 기쁨을 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바로 이것이 고난당하는 중의 기쁨이다.
그러면 믿음은 어떤 방식으로 산을 옮기는가? 그것은 이렇다. 가장 무거운 고난도 산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다. 언어가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은 정확히 그 반대다. 곧, 고난은 산처럼 무겁게 사람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자가 여전히 그 고난이 그에게 유익하다고 믿으면, 그때 그는 산을 옮긴다. 그래서 그가 밟는 모든 걸음으로 산을 옮기는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동안 날마다 산을 옮긴다.
산을 옮기기 위해, 사람은 산 밑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난당하는 자가 무거운 짐 밑에 서는 방식이다. 이것은 무거움이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동안에 믿음의 인내란 이것이 유익하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산을 들어 올려 그것을 옮긴다.
이 믿음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원리보다 더 강력하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믿는 자 앞에 거대한 산이 있다. 그러나 그가 그 멍에가 유익하다고 믿으면, 유익함이 산에게 걸어갈 수 있는 발을 준다. 지렛대로 들어올릴 필요조차 없다.
믿으라! 그러면 산을 옮긴다.
단 다른 사람이 “네 짐이 유익해. 믿어”라고 말해야 소용이 없다. 이 믿음은 누가 밖에서 넣어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교도소 밖에 면회 온 사람과 같다. 교도소 밖에 있는 누군가 말한다. “그냥 그 속에 있는 게 유익하다고 믿어.”
아마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은 분개할지 모른다. 자신의 속사람 안에서 그 멍에가 유익하다고 믿지 않는 한, 누가 이 믿음을 줄 수 있으랴!
그때, 그에게 기쁨은 이렇다. 깃털, 그래 깃털을 생각해보자. 깃털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것이 기쁜가? “음, 가볍군.”
그러나 누군가 무거운 무게로 다가서더니, 그것을 보고 자신의 힘에 대하여 절망했지만, 그럼에도 그 무게를 시험해 보고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할 때,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기쁨의 놀라움으로 소리친다. “가볍군요!”
그렇다면 그는 성급했는가? 그가 자신의 힘에 대해 절망했다는 것을 망각했는가?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망령되게 하였는가? 절대 아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 바로 이것이 명확히 믿음의 복된 놀라움이다.
오,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복된 기쁨인가! 일반적으로 이런 것을 생각해보라. 기대의 성취다. 예를 들어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다. 고시 합격 전까지는 기쁘지 않다. 합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린 후에, 기쁨이 찾아온다.
또한 기쁨이 오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난의 유익함, 이것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다. 오는 데에 실패하지도 않는다. 이 기쁨은 즉각적으로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니까.
따라서 무거운 고난이 유익하다고 믿는 믿음은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욱 완전하다.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 지나면 회복될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의 유익함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고난당하는 중에도 회복은 있고, 고난당하는 중에도 언제나 유익함은 있다. 어떤 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유익한 고난, 이 멍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만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내 멍에가 유익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