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11) 온유 리더십
기독교는 물질적 번영이나 사회적 번영을 보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번영’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러 오신 분도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사도 바울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1).”
누가 자유인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온유한 종’이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예 신분이라도 그가 자유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때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간다.
자신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는 불행한 자다. 인간의 동정심은 그의 지식을 공유한다. 어쩌면 바리새인이 금식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동정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들은 구제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보상을 받은 것이다. 하늘의 상은 없다. 그리하여 복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기도하려면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마 6:1-6).
정확히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나면서부터 노예인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사슬에 묶여 평생을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에게 노예로 살아가는 삶은 평생 져야 할 무거운 짐이다.
그때 그가 용기 있는 노예였다면, 그래서 사슬을 물어뜯기 위해 대드는 것, 사슬을 경멸하는 것,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주인의 부당함을 폭로하며 저항하는 것, 물론 이런 일은 대단하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것은 아니다.
인내로 사슬을 참는 것은 어떨까? 이 역시 가볍게 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인 자가 자유인이 명예의 사슬, 명예의 화관을 쓰는 것처럼 참는 것, 이것은 속박의 사슬을 가볍게 참는 것이다. 바로 이런 노예가 있다면, 그는 온유한 사람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노예 상태일 때가 많이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욕구의 노예, 성공의 노예, 쾌락의 노예 상태에 있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미 노예 상태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는가? 노예 상태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다. 그의 상태를 염려하며 말이 없는 사람은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조금 쉽게 말해, 성공의 노예가 되어 성공을 꿈꾸며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하며 염려하는 사람은 어떤 확신도, 어떤 부정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
이에 반해, 온유한 사람 역시 말이 없다. 더 심하게 말해, 그는 영원히 말이 없다. 그러나 온유한 노예는 그의 상태를 염려하지 않는다. 담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의심하지 않고 강하게 믿는다. 그는 믿음 안에서 건강하고 자유롭게 숨을 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므로, 그 짐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온유함은 보상이 없는 미덕이다. 온유함은 아주 조용하게 걷기에, 아무도 무거운 무게를 알아채지 못 한다. 심지어 온유한 사람에게 짐을 지운 사람조차 정말로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용기는 눈에 보이는 승리로 보상받는다. 고매함은 긍지의 휘광(glance)으로, 인내는 고난의 증거로 보상받는다. 그러나 온유함은 인식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온유한 노예는 온유함으로 주인의 불의를 숨긴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과 아주 좋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온유함의 도움으로 말이다!
이리하여 여행자는 노예가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는 눈치챌 것이고 그의 동정은 깨어나게 되고 노예제도의 두려움을 낱낱이 서술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온유한 노예를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주인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조용한 여인이 온유하게 남편의 모든 말썽과 기분과 수모를 참을 때, 아마도 그의 불성실함,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그것은 보일 수 없다. 그녀가 그것을 인내하며 참는다면, 그때 그것은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있든 발견되어야 한다면, 이 온유한 여인은 거기에서 행복한 결혼만을, 사랑스러운 남편만을 보게 한다. 그리고 남편과 행복해 하면서 그녀의 집에서 행복한 아내를 보게 한다.
그렇다. 그녀는 축복받는다. 그녀가 남편과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온유함에서 축복받는다.
“나에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마 11:29).”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온유했다. 온유하지 않았다면, 주님은 고난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에게 저질렀던 불의에 두려워 떨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주님은 온유함으로 세상의 죄를 숨겼다.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다. 결백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군중들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말하지도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는 말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눅 23:33).”
여기에서 그의 온유함은 그들의 죄를 숨기지 못했는가! 왜냐하면 그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죄가 원래 있는 것보다 훨씬, 훨씬 적은 것처럼 보이는 반면, 다른 의미에서 그들이 온유함에 죄를 짓게 됨으로써 죄는 훨씬 끔찍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그를 세 번 부인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를 온유하게 바라보기만 했을 때, 이 온유함은 베드로의 죄를 숨기고 훨씬 적은 무엇으로 만들지 못했는가! 단지 말씀에 있는 통곡을 들어보라.
다시 말해, 그가 배신을 당하고 적의 손에 넘겨져 모욕과 조롱을 당하는 순간에 그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통곡을 들어보라! 그것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단지 언급만으로도 당신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몸서리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이 타락이 얼마나 깊은지 사람이 알지 못 하도록 숨긴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이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특별한 흔적이다. 주님은 말한다.
“누구든지 내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
반격하지 않는 것이 온유함이 아니다. 불의를 참고 그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도 온유함이 아니다. 그러나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온유함이다. 고매함 또한 불의를 참는다.
그러나 고매함이 불의 위로 오를 때, 그것은 실제로 불의를 있는 그대로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인내 또한 불의를 참는다. 그러나 인내 역시 불의를 있는 것보다 더 적게 만들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상상해 보라. 한 대를 내리치는 순간, 당신의 관심은 그 불의에 멈추지 않는가. 당신은 고매한 사람에게서도 그것을 보고 인내하는 사람에게서도 그것을 본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이 조용하게 왼뺨을 돌려댈 때, 당신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불의를 가볍게 참기 때문에, 당신은 가해자에게 덜 분개하게 된다. 당신의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온유함이 아니다. 그러나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는 것, 그것은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진다. 그리고 상처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기 때문에 죄지은 자 편의 불의는 적은 것처럼 보인다. 이교도가 알지 못하는 것이 이 온유함이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이 온유함은 하나의 영광스러운 특징이 있다. 곧 이 온유함은 이 땅의 보상이 없다. 그러나 다른 영광스러운 특징이 있다. 그 보상은 하늘에서 크다(눅 6:23).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