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슬퍼서 우는 것이냐, 억울해서 우는 것이냐?”
영화평론을 해 주시는 이영진 교수님(호서대)이 이번에는 최근 여름 시즌을 맞아 잇따라 개봉한 한국 영화 <인랑>과 <신과 함께>를 비교해 주셨습니다. <인랑>에는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김무열, 한예리 등이, <신과 함께 2: 인과 연>에는 하정우, 주지훈, 김향기, 마동석, 김동욱, 이정재 등의 배우가 각각 출연했습니다. -편집자 주
영화 인랑(人狼)은 일본의 ‘적군파’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배경과 적군파의 형성 배경이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쟁 이후 재건 시대를 거쳐 평화 시대를 앞두고, 그 길목에서 벌어지는 혼돈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전후 복구를 위해 매진하던 경제성장은 빈부의 격차를 낳았고, 이런 사회 갈등은 ‘섹트’라 불리는 지하 무장조직을 낳는다.
영화상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조직을 ‘자치경’이라 부르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위대’라는 이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일본은 왜 자기네 군대를 군대라 부르지 않고, 자위대(自衛隊)라 부를까. 그것은 전범 국가로서 군대를 보유할 수 없었던 그들 헌법의 기초를 반영한다. 자국 방위의 본진은 패전 당시부터 주둔하던 미군이 담당하고, 확장된 치안이라는 의미에서 자위대를 두도록 했던 것이다.
자치경은 육상 자위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폭력의 수위가 높아져 가는 ‘섹트’를 진압할 목적으로 특수기동대(특기대)를 설립했는데, 정부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들과는 별개의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자치경을 견제시키려는 조처다.
문제는 점점 평화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발생한다. 폭력 수위가 높았던 ‘섹트’가 점점 힘이 빠져 존재감을 잃게 되자, 초법적 수위의 폭력을 쓰는 특기대의 존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회의를 품게 된 것이다. 그런 특기대를 제거할 목적으로 정치적 적수들이 섹트 소속의 한 여성과 특기대 소속의 한 남성의 스캔들을 공작으로 거는 내용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그런데 왜 국산 ‘인랑’은 망작(亡作)이 되었을까.
이 원작에서 섹트는 적군파라고 앞서 일러두었다. 적군파는 단순히 빈부 갈등으로 형성된 조직이 아니다. 본질상 칼 마르크스와 레닌을 따르는 이념 집단이다(1969년 결성). 자본주의로 환골탈태한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실질적 무력을 행사하는 강도 높은 적색 집단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적군파(Red Army, 赤軍)’인 것이다.
섹트(sect)란 학술적으로 헤레시(heresy, 이단)의 전 단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완전 이단은 아니고 ‘준(準) 이단’ 즉 이단의 바로 직전 단계란 뜻이다. 국산 ‘인랑’이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촬영 기술이나 배우의 연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과 극의 구조상 불일치 때문이다.
우리 현실계에서는 과거 모종의 ‘섹트’였던 세력이 정권을 잡은 상황이 실존함에도, 극상의 섹트를 난데없는 ‘태극기 부대(영화 초반에 암시)’로 묘사하다니, 졸작이 된 가장 큰 이유이다. 적군파가 극우라는 그릇된 전제는 감독의 역사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치더라도, 여기서 코미디가 되고 만 것이다.
현실의 태극기 드는 가정주부들과 영화 속 칵테일 화염병 드는 빨강 망토가 도무지 연결도 안 되거니와, 세계가 깜짝 놀랄 현란한 테러를 구사했던 적군파를 이 아주머니들과 연결지으려니 도저히 몰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효주와 강동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비극의 아우라가 나오지 않았던 원인이기도 하다.
극은 극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이 아니라, 극 플롯은 반드시 현실 플롯과 해석학적 전이 관계(hermeneutics circle)를 이루기 마련이다.
감독의 원작 해석에 이 기초가 없어 ‘망작’이 되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적군파(赤軍派)와 주사파(主思派)의 괴리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군파는 섹트로 소멸하였으나, 주사파는 명실상부 권세 잡은 헤레시에 등극한 그 현실이, 바로 이 멋진 원작을 망친 것이다.
‘섹트’는 분파지만, ‘헤레시’는 권력인 까닭이다.
참고로 원작은 전후 주둔 세력을 독일군으로 상정하고 있다. 인랑의 복장이 독일군 복장(Darth Vader)이다. 즉 원작 인랑(人狼)은 독일을 위시한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전제로 깔고 있는 셈이며, 주인공 남녀의 비애는 이루지 못하고 스러진 막시스트(marxists)와 그들을 처단하고서라도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했던 사무라이 정신 속에서만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국산 ‘인랑’에는 이런 핵심 플롯이 다 사라져 버리고, ‘초코라테’ 한 잔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바람에 망작의 길을 걸었다.
한편, ‘신(神)과 함께’는 ‘부모살해’라는 패륜을 다룬 영화이다. 그렇지만 불쾌하지가 않다. 이것이 흥행의 비결이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이 인간의 전(全) 역사를 단번에 스캔하고는 “누구나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죠”라고 태연하게 말한다든가, 아버지와 겨루는 영화 ‘Desire Under the Elms(느릅나무의 비밀, 1958)’가 불편한 것은, 다 근대 서구 프로이트 학파의 태연한 정서를 이어 받은 여파이지만, 이 영화는 불편하지 않게 잘 만들었다.
전편에서 ‘어머니 살해’를 다루었다면, 이번 후편은 ‘아버지 살해’가 주제이다.
‘작시(Ποιητική)’에서의 ‘악인’이란 현실에서의 지존파나 주사파가 아니라, 무지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전편에서의 주인공은 청소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생활고 속에 병들어 의식 없는 어머니를 베개로 눌러 죽인 다음, 자신도 죽으려 한다. 이를 말리는 동생을 죽도록 두들겨 패는데도, 영화는 관객의 이해를 동반한다. 이것이 ‘작시’의 기술이다. 천하의 패륜을 이해하다니.
전편이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면, 속편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한다.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모른 척함으로써 아버지 살해의 주모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안다. 단지 모르는 척 하는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지, 모든 사실을 안다.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유식하면 유식한 대로 이 기술을 구사한다. 이러한 인식의 메커니즘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무지에 매몰시키는 것이다.
그러고는 몰랐다고 말한다.
전편의 주인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던 어머니의 얼굴을 베개로 짓누를 때의 순간이, 주인공이 죽고 난 뒤 심판정 앞에서 모래 그림으로 재형된다. 당시엔 정신을 잃고 의식이 없는 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그 영상 속에서는 아들이 누르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알았지만 저항하지 않고 아들들을 위해 그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후(死後)에야 비로소 어머니가 알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무지에 대한 폭로가 바로 ‘최후의 심판’의 원리이다.
기독교인의 경우 대개 자신의 기독교가 불교나 이슬람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줄 알지만, 이 무지에 대한 폭로가 기독교도들을, 불교도들을, 이슬람교도들을 지옥에 보내는 것이다.
유독 후편에서는 죽어가며 눈물 흘리는 주인공이 어떤 목소리 하나를 듣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 “슬퍼서 우는 것이냐, 억울해서 우는 것이냐?” 심판자가 묻는 것이다.
“슬퍼서 우는 것이냐 억울해서 우는 것이냐?”
우리는 슬퍼서 우는 것일까 억울해서 우는 것일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억울해했다. 탕자의 형은 가산을 탕진하고 온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를 보며 억울해했다.
전편에서의 아들은 배운 것 없고 병약하고 장애까지 있는 어머니의 이해를 압도하는 전지적 시점을 지닌 주인공이지만, 어머니의 이해는 아들의 이해를 압도적으로 견인한다. 무식한 어머니보다 아들이 압도적으로 무지한 것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속편에서의 아버지는 자기를 죽인 아들에게 기회를 주는 자이다. 이 역시 아들의 이해를 압도적으로 견인한다. 아버지의 이해로 아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는 권한을 탈환한다. 그리고 무지를 통해 기회를 부여한다.
“슬퍼서 우는 것이냐 억울해서 우는 것이냐?”
바로 아버지의 소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압도적으로 몰랐던 것이다. 이 몰랐던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탄식을 가르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라고 고백한 바 있다. 법이면 법이지 ‘죄의 법’은 무엇이며, ‘나를 사로잡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의 ‘죄’란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를 일컫는다. 바로 어머니가 베개로 눌리면서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죄’, 아버지가 자신을 죽도록 방치한 아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죄’, 이러한 죄 형식을 일컫는 개념이 바로 하마르티아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형식이며, 우리가 이 무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법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원죄란 철학적(혹은 신학적) 신에게서 부여받은 감각할 수도 없는 어떤 철학적(혹은 신학적) 관념의 죄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이야기(Storytelling) 속에서 능히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죄 양식인 것이다.
그렇기에 극은 극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이 아니라, 극 플롯은 반드시 현실 플롯과 해석학적 전이 관계(hermeneutics circle)를 이루는 법이라고 앞서 일러두었다.
‘인랑’(人狼)은 이러한 작시 기술의 기본이 결여되어 있고,
‘신(神)과 함께’는 이 작시의 본령에 따라 우리의 인식을 파고든다.
이것이 두 작품의 승패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