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제자도 (12) 용서의 짐
우리는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유익한 멍에를 지는 자와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자, 이 사람은 온유한 그리스도인뿐이다.
그렇다면, 먼저 이 질문을 생각해 보자. 영적으로 이해할 때, 어느 것이 가장 무거운 짐인가? 그것은 죄의식의 짐이다.
큰 죄를 짓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어도 행복하다.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사기치고 돈을 갈취하는 사람들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죄의식 때문이다. 심지어는 죄의식으로 인해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한 존경받는 정치인이 불법 자금 수수 의혹으로 목숨을 끊고 생을 마감한 경우가 있었다. 얼마나 죄의식의 짐이 컸으면 죽음을 선택했겠는가?
만약 이런 경우가 사실이라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선다면 어떨까? 사람 앞에서도, 대중들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죄의식의 짐이 증가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실로 죽음이다.
따라서 사람이 명백히 하나님 앞에 선다면, 논쟁의 여지가 없다. 죄의식의 짐은 가장 무겁다. 그러나 죄의식을 가져가고 대신에 용서 의식을 주는 사람, 그는 진실로 무거운 짐을 가져가고 그 자리에 가벼운 짐을 준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용서 역시 무거운 짐이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까지 실천하기에 가장 무거운 짐이 있다면, 용서일 것이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우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용서의 실천을 넣었겠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여하여 주시옵고(마 6:12)”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에게 더 무서운 것을 가르친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나는 용서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최대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원수도 우리의 이웃이다. 복음은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 말하지만, 용서 없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랑의 실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용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의식이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죄 용서받는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은 용서다. 다시 말해, 주님은 가장 무거운 죄의 짐을 가져가시고, 동일하게 무거운 용서의 짐을 맡긴 것과 같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지점에서 ‘온유한 마음’에 대해 말한다. 그가 저술한 <고난의 복음>에 의하면, 온유는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정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온유한 마음은 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가?
가벼운 마음은 모든 것이 잊혀지기를 바란다. 그는 헛되이 믿는다. 그는 마치 사람을 죽이고도 하나님께 그 죄를 회개하면 깨끗이 잊혀졌다고 믿는 사람과 같다. 사람은 두려워서 죄를 말하지 못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은 별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는 사람에게 죄를 공개하지 못한다.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마음이 무거운 사람은 아무 것도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 스스로 그 모든 죄의 짐을 지기 바란다. 그는 죄가 용서되었다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려 한다. 그의 발걸음은 너무 무거워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구나.
그러나 온유한 마음은 모든 것이 잊혀졌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만 용서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진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이 그에게서 용서되었다는 기억만을 지고 가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은 이 기억조차 잊혀지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용서되고 잊혀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믿음의 언어는 그런 가벼운 마음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용서되었어. 맞아. 하지만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는 것만은 기억해.”
사람들은 정말로 많은 방법으로 잊을 수 있다. 나쁜 기억들, 슬픈 기억들, 창피당한 기억들, 이런 기억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잊을 수 있다. 가벼운 마음은 아주 무심하게 훅 날려버려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죄에 관한 한, 오직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잊을 수 있고 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용서다.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죄는 잊혀진다. 물론, 온유한 마음은 이것을 잊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확고하게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무거운 마음은 잊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용서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는 죄를 기억하고 싶다. 따라서 그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이 온유한 마음속에 싹이 튼다. 그 결과, 용서는 잊혀질 수 없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규율가(disciplinarian)가 아니다(갈 3:24).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는 우리에게 잊혀졌던 것을 상기시킬 마음이 없는 부드러운 규율가이지만,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는 것만은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모든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에서 잊혀진다. 당신이 용서를 기억할 때마다, 모든 것은 잊혀진다. 그러나 당신이 용서를 잊는다면, 모든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용서는 낭비된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