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49)
사역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을 향한 회개의 사역을 위한 기도와 준비가 언제나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중보를 아끼지 않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거듭남의 은총을 받아야 할 영혼들이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아무리 종교에 대하여 냉담자이건 반종교가이건 또는 무신론자인건 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죄와 의와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그들의 영혼에 책망을 불러일으키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회개를 일으키시는 성령의 사역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위해 구하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 예를 소개한다.
<case> 필리핀 민다나오에 있는 한 원주민 신학교에서 성령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을 때였다. 강의 시간에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듣고 있던 남학생 하나가 훌쩍거리더니 마침내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강의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나, 그 학생은 걷잡을 수 없이 울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마침내 다른 학생들도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훌쩍 거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강의실 안에는 학생들의 울음소리가 높아가게 되었다.
나는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회개의 영을 부으시고 계심을 깨닫고는 학생들에게 기도 시간을 내주었다. 그러자 모인 학생들에게서 통회자복의 기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첫째 날에 이어서 둘째 날도 계속해서 학생들이 참회하면서 울며 기도하였다. 둘째 주간에도 모든 학생들이 눈물과 통회의 결단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였고, 성령께서는 이들에게 큰 치유와 능력을 부어주셨다.
그리고 이 신학생들에게 참다운 회개의 열매는 곧 선교를 위한 결단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은 진정한 부흥이 이 곳 민다나오에 퍼져나가기 위해, 그리고 복음이 민다나오 전체는 물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모슬렘권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가도록, 스스로 죽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리라는 순교적 영성으로 무장하는 큰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께 이끌려 사용되는 사역자들이 이 회개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의심치 않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기도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래서 영혼들이 지닌 불신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의 의가 되심을 깨닫게 하시며, 또 심판의 엄중함 앞에 두려움으로 회개하여 거듭남의 은총에 이르도록 성령께서는 역사하시는 것이다. 세계 복음화를 완수해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 세계의 영혼들을 위해 쉼 없이 간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복음 앞에 진정한 회개로 나아올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다.
죄를 회개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은 죄 용서에 대한 극단적인 해석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이 마치 죄를 지을 수 있는 특권이라도 받은 듯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지나친 합리화의 유혹에 빠져 있다; "나의 죄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모두 깨끗해졌어.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심지어는 미래에 내가 지을 죄까지도 이미 다 용서된 거야.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을지라도 나는 이미 구원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오늘날 현대교회를 무섭게 마비시키고 있는 죄 용서에 대한 과도한 합리화의 모습은 마치 사도 바울이 지적한 유대인들의 독선의식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여 이 민족을 통해 전 세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을 일으키려 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 오해하였다. 즉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고 이방 나라는 저주 가운데 두셨다고 하는 생각이었다.
이 같은 생각이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에 와서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났다. 그래서 기독교 발생 이후 최초의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렸는데, 이 회의 주제 중의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이방 사람들도 위한 것이냐 하는 복음의 적용 범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논의 이후, 결국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가 밝혀졌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롬 1:16)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에게도 이런 오해가 많이 빚어진다. 많은 이들이 한 번 자기 합리화를 시작하면 걷잡지를 못 하고 좀처럼 자기의 허물이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이 모든 일을 허락하셨다고 하면서 무조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믿기 때문이다.
"죄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참 정체를 알지 못하게 속박하는 것이다."(Andrew Murray) 하나님은 끝없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신다고 믿는 신념 안에서 온갖 죄악이 저질러지고, 그리고 이에 대한 지나친 합리화의 해석까지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전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 이러이러한 죄 때문에 심판 받는다고 말했다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당연히 그런 죄로부터 벗어나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크리스천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지 죄에 대한 자유가 아니다."(A. W. Tozer)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마치 죄 지어도 천국 간다는 보장이나 받은 것처럼 죄 짓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습관적으로 같은 죄를 지으면서도 마음이 강퍅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다. 이런 이들을 위해 꼭 필요한 말씀은 '하나님은 유대인이게나 헬라인에게나 다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9-10 참조)고 전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