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기독교, 한글로 소통하다
1446년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글자임을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했다.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었다. 그 때, 기독교는 한글만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되며,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인과관계를 가져왔다. ‘기독교’는 ‘한글’이라는 통로를 통해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한말, 더군다나 구식교육 즉 한문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서민 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치어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복음 전파는 한글로 소통하며 개막되었다.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의 ‘예수성교전서’나 일본에서 씌여진 이수정의 현토 신약성경이 다 한글을 사용하며 시작되었으니, 한국 기독교의 첫 사업인 성경보급이 근본부터 한글운동의 시대를 열게 된 셈이다.
그 뒤에 한자를 섞어 쓴 이른바 국한문 성경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이는 일부 한자 지식인의 요구를 수용한 것 일 뿐 전체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 아니라 쪽복음과 전도지 등에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고, 1895년 기산 김준근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 등 기독교 문학의 번역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예수교회보’ 등 신문과 ‘신학월보’, ‘신생’ 등 잡지를 내며 빠르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최초의 장로교 공의회는 모든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였다. 한글만으로도 넉넉히 모든 진리를 적어내며,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소통이 되고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이, 선교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성도들과 대중에게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기독교의 모든 인쇄물도 대부분 한글로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한글의 보급을 위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하였다. 그런 사례로 1874년 프랑스 선교사 달레 선교사의 ‘조선교회사’와 파리 외방선교회가 출판한 1880년 ‘한불자전’, 그리고 1877년 존 로스의 ‘조선어 첫걸음’ 등은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높이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런 노력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1880년 언더우드의 ’한영문법’과 1890년 ‘한어자전’은 한글 체계화의 기초가 되었고, 이어 1893년 게일선교사의 ‘한영자전’ 등은 한글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 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런 한글 운동으로 문맹을 퇴치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나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신앙과 표현의 말씀을 배우며, 글을 읽고 쓰는 방법까지 깨우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말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산간 벽촌의 기독교인들은 그 마을의 유식자로 말과 글의 지도자가 되어 갔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게일 선교사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은 한글의 과학적인 면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외에 알리려 노력하였다. 그들의 연구는 한글의 가치를 널리 세계에 번역 소개할 것만이 아니라 완고한 한학자들에게도 이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게 이 글의 효용성과 편리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이렇게 한글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되자, 한글에 대한 존중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한글을 지키려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한글을 통해 복음을 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심리라 할 것이다.
한글운동의 선구자로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친구이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주시경 장로가 있다. 이들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상동교회에 ‘조선어 강습원’을 열어 한글을 보급했다.
또 한글이 15세기에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에 19세기 근대에 사용하기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을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주시경 선생이 펴낸 ‘국어문법(國語文法)’이나 ‘말의 소리’는 국어 문장의 성분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해 최초로 구문도해(構文圖解)의 방법을 활용하였으며, 특히 근대 언어학 용어를 순 우리말로 고안하여 이를 체계화해 놓았다는 점에서 한글 보급에 있어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38년 이전까지는 ‘조선어’를 필수로 ‘일본어’를 병용토록 하였으나, 그 이후 총독부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도록 강요하고 우리 국어를 ‘조선어’라고 명명하며 일본어만 상용토록 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말살하려는 악랄한 수단에 못 이겨 학교에서 한글이 사라졌고, 심지어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는 ‘창씨개명’까지 강압하여 거리와 집안세서도 우리말, 우리글이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럴 때에도 오직 기독교 교회에서만 성경이 한글로 적히고, 목사의 설교가 우리말로 선포되고, 찬송가의 가락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파되었다. 3·1 운동과 더불어 우리말, 우리글 수호의 공만 해도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라는 말을 듣기 부끄럽지 않았다.
사실 학교에서도 우리의 말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교사나 학생이 많아 주일날 예배당에서 예배 전 한글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고, 예배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그들은 영혼의 해방과 민족혼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의 한글 운동은 또 다른 애국운동이었다. 이런 한글사랑과 연구를 통한 진흥, 출판은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글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뿐 아니라 그 밖에도 오산학교 한뫼 이윤재, 정동교회 김윤경, 새문안교회 최현배, 정태진, 정인승, 장지영 같은 한글학자 등은 다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였거나 기독교 학교에 봉직하며 이를 연구하고 사랑하여, 이를 지키고 선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이윤재는 교회의 장로로서 한글보급 운동에 최대의 열정을 기울였기에 ‘한글 장로’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장로교 강병주 목사는 항상 한글 운동을 전도와 함께 하였기에 ‘한글 목사’라 불리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한글 운동의 중심이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의 한글 운동의 학문적 열정과 관심은 ‘조선어학회’의 기초가 되었고,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 반대해 1921년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기 위한 ‘조선어학회’를 태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어학회’는 장지영, 김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며 한글 수호의 길을 걷게 된다.
일제 강점기 말,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대해 온 사회가 수용하려 할 때도, 기독교 성경의 맞춤법은 한글 운동자들의 수차례 건의와 교회의 결의에도 이를 쉬이 고치지 않고 6·25 동란까지 낡은 맞춤법 성경을 고수했다. 이는 한글을 지극히 존중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글 덕택에 복음 진리를 알게 되었고, 이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또 다시 한글날을 맞으며,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한글을 사랑하고 이를 진흥시키는 일이 대한민국 기독교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한글 창제 572돌을 맞으며,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글과 말을 지키려 옥고를 치른 주시경,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 한글 운동을 이끌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게 된다.
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