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19)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다. 말씀대로 살면서 고군분투하지만 언제나 패배의 쓴 맛을 볼 때, 여전히 믿음 안에서 행하지만 고통이 제거되지 않을 때, 믿음의 행군을 함에도 불구하고 방해하는 세력은 날로 증가될 때, 이유 없이 고통을 겪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계시냐는 것이다. 만일 계시다면, 하나님이 사랑인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이때 큰 범주에서 문제를 찾자면 둘로 요약될 것이다. 문제가 나에게 있든가, 하나님께 있든가. 문제가 나에게 있다면, 나는 결백한 자가 아니다. 나에게 언제나 문제가 있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님께 있다면?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저런 식으로 고통당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
이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큰 목소리가 올라온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나는 오직 말씀대로 살려고 한 것뿐인데, 왜 이런 고통과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잘못을 행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있는 것이고 나는 죄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 “네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 벌을 받은 것이다”고 말할 때, 욥이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의인의 고난을 설명할 수 없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처럼 보인다. 악인은 날로 번성하지만, 의인은 세상에서 언제나 고초를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악인의 번성함과 의인의 고난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고난을 없이 해달라고, 패배를 가져가시고 성공을 달라고 기도한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기도는 정당한가?
이런 기도의 문제점은 아직 하나님이 사랑인 것이 결정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하나님의 의로움을 입증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무엇보다 의로운 자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키에르케고어는 <고난의 복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한 마디로 결론을 짓는다면, 이 세상에 의로운 자의 고난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의로운 자의 고난은 오직 단 한 경우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 한 분은 의로운 자였고 고난당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는 욥처럼 아무 잘못도 없이, 의인으로 살면서 고난당할 때조차도 언제나 죄책으로 고난당한다. 안타까운 일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의인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한히 연기되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사랑이었다는 생각이다.
한 번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보자. 우리가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말씀대로 살면서 여전히 고난을 겪고 악인의 형통함을 볼 때, 우리의 의무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증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가운데 우리는 여전히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사랑인 것을 믿는 것인가?
이방 종교는 신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고 있다. 똑바로 살지 못하면 천벌을 받고 죽는다는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인이 이런 공포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불로 태워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사랑인 것에 의심을 품고 살아간다. 그들은 이방인의 공포를 갖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모든 운명을 쥐고 계신 분이라는 것, 그분의 손이 지금 우리의 운명을 쥐고 계시다는 것, 그분의 비밀의 본성은 은폐되었다는 것, 그분의 바탕은 사랑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교활함이라는 것,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사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라! 성경이 언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증하라고 명령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받는 적도 없다. 다만, 우리는 확실히 믿을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믿음으로써 그분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요구받았다.
그분이 영원한 사랑이라면, 이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그래서 그분이 교활하기 때문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두려운 것이다.
인간이 70년을 산다면, 어쩌면 인생 70년 내내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런 수수께끼가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가 아무리 죄책으로 고난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 두려운가? 하나님이 사랑인데.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길을 걷더라도 무엇이 두려운가? 하나님이 사랑인데. 악인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여도 무엇이 두려운가? 하나님이 사랑인데.
그때 죄인이 설교한다. 그것도 십자가상에서. 주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신음할 때, 바로 그 옆에서 설교한다.
“나는 죄책으로 고난당합니다. 내가 고난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하지만 저기 저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이 저렇게 고난당하고 있습니다(눅 23:41 참고)”.
우리가 저 강도의 자리에 달린다면, 우리 역시 저 강도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겠는가? 내가 욥처럼 고난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나의 고난이 의인의 고난인 것처럼 느껴질 때, 이 세상에서 의인으로써 고난당하신 유일한 한 분이 있었다는 것,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저 죄인의 “설교”를 묵상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시험을 받은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 분만이 죄 없이 고난당했다고 하는 사실이 더욱 깊이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의 시험은 주님이 받은 시험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 게다가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것, 이런 사실이 더욱 깊이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