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 아무리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본지는 [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인 그는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의 글은 박 목사가 운영하는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본지는 박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합니다. 아울러 필자의 요청에 따라, 글이 그의 웹페이지에 게시된 날짜를 맨 아래 밝혀둡니다. 특히 이번 글은 2007년 2월 2일에 쓴 것이지만, 지난 편 '교회를 섬기며 너무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에 이어 연속으로 소개합니다.
[질문]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 파당을 만들어 자기들 편만 편애하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나 무례하게 대하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그래도 사람 대신에 하나님만 바라보려고 그들에게 선한 마음으로 다가서보지만 도리어 더 큰 실망으로 돌아설 때가 많습니다. 주일날 그들이 설치는(?) 것을 보면 설교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안 됩니다.
아무리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제가 잘못이 아닌지 의심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를 옮겨볼까도 생각 중입니다만 그러는 것이 더 비겁한 행동인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신자가 겪고 있는 애로사항입니다. 저 같은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하며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믿음을 갖고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모두가 그런 애로를 겪고 있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그 정도가 세든 약하든 간에 똑 같이 그렇게 비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완전한 교회와 완전한 성도는 이 지구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영원토록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세운 역사상 최초의 교회 그것도 교인이 열두 명밖에 안 되는데도 그랬지 않습니까?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지 다투었고, 누가 더 주님의 사랑을 받는지 시샘했고, 나중에는 직접 주님을 배반한 자도 나왔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연약한 인간, 아니 예수를 믿는 자들의 모습이자 지상 교회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치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역자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또 믿음이 좋다는 의미 자체가 자기 힘으로 모든 자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못하니까 더욱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선 교회를 옮기는 것은 고려 대상에서 빼는 것이 좋습니다. 옮긴 교회에도 동일한 문제 어쩌면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옮길 수 있는 이유는 셋뿐입니다. 이사를 가서 교회가 너무 멀어졌을 때, 특정 교회에서 꼭 특정한 사역을 맡아야 할 때, 그리고 교회와 담임 목사가 이상한 노선으로 흐를 때에 말하자면 영적지도에 도저히 은혜가 생기지 않을 때입니다. 성도들 간 분쟁도 아니고 단지 호불호(好不好)만으로는 교회 이동의 필수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사실상 어지간해선 그렇게 되기는 힘들고 또 시간도 아주 오래 걸립니다. 그럼 그렇게 용서될 때까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기다려주는 수뿐입니다. 내가 용서가 되든지 그들이 바뀌어 돌아오든지 둘 중 하나로 결말지어질 때까지는 다른 교회로 옮기지 않는다면 참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결말이 날 때까지라는 말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무작정 아무 일이 없는 양 모른 척하고 끝까지 버티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드시 선한 결과를 맺기 위해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선한 열매가 맺히도록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또 기도한대로 하나씩 실천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일도 너무 힘든 일입니다.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당장에 밉고 꼴도 보기 싫어 기도조차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작 따져야 할 것은 그 동안을 어떻게 잘 참고 넘길 것인지 입니다. 그 길도 하나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가능한 한 그분들과 안 부딪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 피함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차원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와 필요는 성도 본인의 영적 충만입니다. 그 영적 충만에 방해가 될까 우선 피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영적으로 바로 서 있어야 그들을 사랑, 아니 용서, 아니 정당한 방식으로 상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란 반드시 어디에선가 그런 분들과 상대를 해야 할 부분이 생깁니다. 구역 공과를 같이 안 해도 경조사에 서로 축하나 위로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기고 심지어 무슨 행사를 하는데 우연히 옆 자라에 동석하게 됩니다.(사실은 하나님이 서로 부딪혀서 해결하라고 같은 자리에 일부러 붙여준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같은 부서에서 일을 협조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사실은 같이 일을 하다 보니 미운 동료가 생기는 것입니다. 별로 상대를 하지 않은 사람끼리는 서로 장단점을 모르는데 미움이 생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그런 상대를 대할 때에 정말로 사람 대신에 하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을 당장에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하는 말이나 일이 기도해 보고 옳은 일이라면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냉철하게 그들 편에 가담해 도와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반대하는 측에선 그 일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반대로 흐르기 쉽기에 벌써 교회 안에는 파당이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보지 않고 일의 성격에 따라서만 가부 간을 결정하다 보면 자칫 회색분자나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양쪽에서 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 전체의 왕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옳다면 혼자서라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적 정실로 의사결정을 하더라도 참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쫓아야 합니다. 옳은 일이라면 어느 쪽이라도 과감히 함께 서서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감정적으로 싫은 것은 상대만 안 하면 참고 넘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왕따를 당할지라도 주님 따라가는 길이야말로 신자가 감당해야 할 참 십자가입니다. 단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어느 쪽이 교회와 성도 간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지의 여부만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예수 이름으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도 이적을 행하지도 말라는 유대 당국의 협박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라고 담대히 선포한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뭐라고 하던 그래서 자기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오든 복음은 확장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한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또 공적인 일에선 협조하는 것 등은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입니다. 계속 그 상태로 끝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혼자서 성경을 배우고 믿음을 키우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로 이 땅에서부터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천국의 모형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천국 모형 가운데 파당이 존재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국에도 고린도교회처럼 바울파, 아볼로파로 나눠져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서 하나인 성령 안에서 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내가 먼저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억지로 좋아하거나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의지적으로라도 그렇게 하면 그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려면 본인부터 진정으로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성령의 역사에만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려 들다간 오히려 사단의 방해로 역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적으로 사랑하기 이전에 그들을 유심히 관찰부터 하셔야 합니다. 사랑은 좋아해주는 감정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도 이해해줄 부분이 있거나, 나름대로 연약한 부분을 반드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설령 너무 나쁜 점만 두드러져 불쌍한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을 때에도 최소한 그들 속에서 나와 똑 같거나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말하자면 나라고 해서 그들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는 깨우침이 있을 때에 나부터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진실한 신자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서 교회 안에도 일부러 가시를 심어 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그들이나 나나 도토리 키 재기로 다 같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들을 진정으로 품고 섬길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인도와 간섭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달라거나 그들이 변화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영적인 유익과 깨우침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을 어떤 편견, 선입관, 고집이라도 비우고 유심히 지켜보셔야 하는 데 또 바로 그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여야 합니다.
물론 끝까지 분쟁만 일삼고 도저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인간 이하의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합니다. 교회가 완전히 깨어질 정도까지 몰고 갑니다. 그럴 때에도 당장 그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보다 우선에 교회 안에는 알곡과 죽정이가 반드시 함께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부터 하셔야 합니다.
말하자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자가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그들도 전도 대상입니다. 아무리 같은 교회의 조직상 직분이 더 높은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도할 대상을 신자가 자기 뜻대로 안 따른다고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밖에선 전도하러 교도소까지 찾아가고 동성애자도 사랑으로 대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렇지 못한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우선 버려야 합니다. 현실의 가시적인 조직체 교회가 하나님이 이 땅에 궁극적으로 세우고자 하는 당신의 나라가 아닙니다. 조직체 교회를 통해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항상 눈에 안 보이는 거듭난 참 성도들의 모임, 조직을 이루든 아니든, 즉 참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믿는 신자들이 그들을 전도 대상으로 보아서 끝까지 기다려주고 참아주면서 눈물로 기도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도 도저히 변화되지 않겠다 싶으면 그 때에는 가장 말썽이 되지 않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다른 더 좋은 교회로 옮기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셔야 합니다. 비록 또 새로운 교회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신자가 교회를 옮겨가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성도나 사역자들과 내 쪽에서 먼저 분쟁하고 싸우려 들지는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변하는 계기로 삼으면서 끝까지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온전하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미워해서 끝까지 사랑하지 못한 실패한 모습도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 성도로서 잘한 짓은 분명 아니지만 그 일로 괴로워하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면 우리를 다시 깨끗케 해 주시고 그럴 수 있는 계기와 힘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럴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고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 있다면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교회 안에 미운 성도는 어느 교회에나 반드시 있습니다. 우선에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시되 공적인 일에선 합리적이고도 정당하게 협조하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 자신과 그 사람들을 동시에 갖고 나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상대가 전혀 변화가 없어도 내가 자라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도 불쌍한 존재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시고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 했는데도 도저히 상식 이하라면 교회 안의 동료 성도가 아니라 전도할 대상이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물론 오히려 가르치려 덤빈다고 자존심이 상해 불쾌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전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욱 직접 상대하지 말고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으면 오히려 기도한 자에게 돌아옵니다.
요컨대 지상 교회와 성도는 모두가 하자가 있습니다. 심지어 사단의 자녀가 교회 안에도 숨어 있습니다. 교회와 동료 성도에 대해 온전한 기대를 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교회와 성도를 바로 세우는 일에 미력이마나 희생하겠다고, 나아가 십자가까지 기꺼이 지겠다고 소원하고 실천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 전투의 훈련장이요 실제 전투장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지 우선 본인의 영적 성장에 유익이 되도록 하셔야 하고 전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1-4)
20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