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20) 언제 흔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일보다 한없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믿기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더욱 좋아한다.
언제 이런 증상이 생길까? 그를 괴롭히는 경쟁자나 그의 적이 나타났을 때, 혹은 실패했을 때나 인생의 고난 길을 걸을 때이다. 이럴 때,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싶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사랑인 것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믿음은 언제 흔들릴지 모른다.
바울이 믿음의 파선으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말했다면(딤전 1:19), 삶의 영원한 기쁨의 파선으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 있는 그의 믿음을 포기한 자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이 믿음을 포기한 자가 살아야 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배가 결합되어 있는 한, 폭풍이여 오라! 배는 단단하다. 좋은 날씨와 좋은 바람이여 오라. 그때는 즐겁다. 그러나 배가 어떤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면, 어떤 나사 하나가 풀려 배의 목재들이 흩어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해로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떨어져 나와 그의 믿음이 파선한 사람, 이 사람은 속사람의 결합으로 고난당한 것이다.
이때 배의 구조상 나사 하나만 조이면 결합을 단단히 조일 수 있듯, 어쩌면 이 믿음이 파선하지 않도록 단단히 조일 수 있는 대못이 필요하다. 이 믿음, 곧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믿는 믿음은 배를 단단히 조이는 나사처럼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믿음의 행군에서 난파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아니면, 전체의 인생은 파선하여 풀려버리고 만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려 하지 말라. 그 길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차라리 언제나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길을 택하라.
욥을 기억하라.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자로 고난당한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죄책으로 고난당하며 항상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오직 의로운 자로 고난당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믿으라. 그때 십자가 상에서 설교한 죄인의 말씀을 들으라.
이 강도는 “저분은 아무 죄 없이 고난당하지만 나는 죄책으로 고난당한다”고 설교한다. 이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설교고 선포다. 그리스도는 죄 없이 고난당한 유일한 분이시다. 어쩌면 이것은 회개의 설교다. 아마 누구도 이런 식으로 설교한 자는 없다. 십자가상에서 죄책으로 고난당하며 설교하다니! 그것도 강도가 회개의 설교를!
우리는 요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김빠진 사이다처럼 맥 빠진 설교를 들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천박한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 회개하는 강도는 정말로 설교하고 있다. 저 솔로몬 왕이 설교자로 불린다면(전 1:1), 하물며 이 회개하는 강도가 설교자가 되지 않겠는가?
그는 회개에 적합한 설교자다. 세례(침례) 요한이 입은 약대 털옷은 확실히 회개에 딱 맞는 옷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훨씬 더 딱 맞는 옷이다.
회개를 선포하는 자가 사막에 산다는 것은 확실히 초라한 임무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여전히 가장 고되고 가장 무거운 자리다.
“회개하라!”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은 회개를 선포한다. 그러나 강도는 선포한다.
“나는 죄책으로 고난당합니다.”
어느 것이 회개에 대한 탁월한 권면인가? 어떤 예언자의 회개의 선포도 “나는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없다. 이 강도는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고 있고, 다른 강도에게 설교하고 있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사이에 매달린 그분만이,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죄 없이 고난당하신 겁니다.”
강도 대신 우리가 저 십자가상에 달렸다고 상상해 보라. 과연 의로운 자로 고난당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여기 십자가에 달린 주님처럼 결백한 자로 고난당할 수 있는가?
그래서 처음부터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지 말자. 아니, 더욱 하나님의 의로움을 자신의 처절한 고난의 현장에 끌어들이지 말자. 그냥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믿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정리해 보자. 일반적으로 누가 회개의 선포를 하는가? 유대인들은 “회개를 설교해야 하는 사람은 거룩한 자”라는 개념에 매달려 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회개를 선포해야 하는 예언자는 거룩한 자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실제 죄인이 회개를 설교한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심지어 거룩한 사람들도 실제 죄인이 회개의 설교자가 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 이 강도는 설교를 시작할 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책으로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설교이지만, 더 엄밀히 말해 그가 말한 이 설교에는 위로와 기쁨이 숨어 있다. 주님은 이 강도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렇다면, 이 강도는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을까, 살아서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을까? 이 강도는 죄 없이 고난당하는 주님의 고난과 비교를 통해, 죄책으로 고난당한다는 생각 속에 위로와 구원을 발견한다.
왜 그러한가? 그때 고난은 하나님은 사랑인지 염려하고 있는 의심의 고통스러운 질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십자가 상에서 경험한다.
그러나 이방인은 모욕당할 때, 선을 위하여 핍박받고, 선을 위해 사형 선고를 받을 때, 슬프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한다.
“나는 결백한 자로 고난을 당했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항상 최선이었고 가장 쉬웠다. 나는 이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상 강도의 설교를 묵상해 보라. 그러면 결백한 자로서 고난당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그는 겸손을 배울 것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