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이지와 범신론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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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

본지는 [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인 그는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의 글은 박 목사가 운영하는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본지는 박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합니다. 아울러 필자의 요청에 따라, 글이 그의 웹페이지에 게시된 날짜를 맨 아래 밝혀둡니다.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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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뉴에이지 사상에 기반으로 하는 방법론들 예컨대 확신의 말, 시각화, 명상법, 호흡법, 뉴에이지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진리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서있으면 그 방법론들은 건강이나 동기부여를 위해 써도 무방할까요?

또 최근 불신자들이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인격신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범신론이 틀렸는지 왜 인격신인지에 대해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의 더 구체적인 내용은 게시판의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hyjesusonly.com/openboardok/31882

[답변]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기에 이런 문제들에 정확하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신앙을 주로 계명과 교리와 신학으로만 파악하여 적용하려 듭니다. 개별적인 문제들이 불거질 때마다 그 셋에 비추어서 옳은지 그른지만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면 질문하신 것처럼 이단의 사상과 실행방안에도 나름의 장점들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어디까지 수용 타협 대처해야할지 곤혹스러워집니다.

그러려면 전문가 수준의 분석을 해야 하는데 현재도 너무 많은 이단들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이단이 출현할 텐데 일일이 따져볼 여유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작업은 신학자들에게 맡겨 놓으면 됩니다. 대신에 성경에 계시된 신앙의 근본원리는 절대적이고도 완벽하므로 그것만 제대로 알아도 이런 문제는 물론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택해서 나름대로 믿음 생활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전의 이 땅에서의 형통한 삶과 죽음 이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에 대해선 예수 십자가 은혜의 구원만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방안입니다. 다른 길을 가르치는 종교들은 아예 거들떠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두 번 훈계하다 듣지 않으면 멀리하면 됩니다.(딛3:10)

둘째 이 땅에서의 형통하는 삶에 관해선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현실적으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과 둘째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삶입니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서의 형통하는 인생을 다른 종교와 다르게 해석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소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그런 목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도덕적으로 의로워도 오직 자신과 가족의 형통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가장 쉬운 예로 무속신앙도 일종의 종교인데 점쟁이를 찾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안락을 위해서 재물 명예 권력을 쟁취하려는 것입니다. 점쟁이가 믿는 신의 정체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신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은 상상조차 않습니다. 점쟁이가 모시는 신들도 그런 것은 물론 거룩하게 자신을 가꾸라고도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뉴에이지, 적극적 사고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트레스 많은 현실 삶에서 마음의 평강을 얻거나 적극적 사고로 자신이 정한 어떤 목표를 달성하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이뤄나가는 힘도 자신의 의지력 신념 등이 전부이거나 최우선입니다. 성품을 갈고 닦는 것도 자신의 위로와 의를 위한 것입니다. 간혹 이웃과의 화평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는 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일시적 상대적 불완전할 뿐 아니라 때로는 악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형통해야 할 일은 크게 둘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자기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신자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력만으로 행해선 안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대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누룩처럼 번져 나가게 하는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서되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어 다른 이들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일에 평생토록 헌신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나 뉴에이지 같은 세속의 사상 철학 등에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이웃과 화평까지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끼리의 불완전한 윤리에 따라 부족한 능력으로 죄에 찌든 본성에 묶인 채로 실현하려 듭니다. 그것도 자기들과 모든 면에서 비슷한 수준끼리의 리그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제 주신 질문에 대한 해답이 거의 나왔습니다. 세속의 방안들을 진리를 실현하는데 활용할 수도 있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적극적 사고 하나만 들어서 답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또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실현하는 데에 즉, 신자가 이뤄야 할 일 두 가지에 아주 적극적이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적극적인 실현에 대해 성경은 이미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하나님 나라는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와 같아서 모든 소유를 팔더라도 사야합니다.(마13:44,45) 주님이 잘못을 범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고 하셨는데 이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은 없습니다.

시중에 회자되는 적극적 사고는 능동적, 낙관적, 적극적, 긍정적으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면 자신의 삶이 형통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동적, 비관적, 소극적, 부정적인 사고로는 실패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기질적으로 타고난 본성을 무시하는 일방적 주장일 뿐입니다. 또 인생을 살다보면 소극적이어야 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그 둘이 조화 균형을 이뤄질 때에 더 선한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남편이 낙관적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려 해도 아내가 비관적 측면까지 구별하여서 조언을 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정말로 성경대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잘못을 범한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여 사랑으로 품어주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자신은 낮아지다 못해 죽어 없어지더라도 상대를 살려내는 일만큼 적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 자체로 이미 적극적 사고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를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즉시 순종만 하면 됩니다. 또 나에게 맡기신 소명을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평생을 두고 실현하면 됩니다. 다른 어떤 그럴싸하고 합리적이고 경건한 방법론도 필요 없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7,8)

본문의 바로 앞에선 그는 육체로 신뢰할만한 것으로는 당시 사회에선 최고 수준으로 전부 갖추었다고 말합니다.(4-6절) 세상의 지식에서 제일 뛰어났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신자로서 살아가는 데는 그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해(害)로 여기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을 받은 후로는 세상의 인간이 고안한 어떤 학문, 사상, 종교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예 전부 버렸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사도이므로 우리 일반신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신자들은 초대 교회 때에 사도들이 수행했던 소명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각자 처한 세대와 장소에서 그들처럼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세상의 사상과 종교들이 가르치는 것들 중에서 오로지 방법으로만 활용한다면 원칙적으로는 그래도 됩니다. 정말로 본인은 죽더라도 다른 이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만 사용한다면 말입니다. 또 그런 방법을 자신의 건강을 증진하고 성장을 위한 동기부여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단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의 기준에 부합한다면 말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인간이 자신의 평강 안락 형통을 위해서 고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들 중에 진정하고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데 필수적인 방안이 있겠습니까? 더 중요하게는 그런 것들을 사용할 때에 성령이 함께 해주지 않을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자신의 거룩한 성장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 즉, 신자가 평생토록 행해야 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완벽한 방안을 이미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범사에 기도하면서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보호 인도를 간구하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삶을 이웃 앞에서 실현해 보이는 것입니다.

간혹 단순히 세상 어려운 일에 정신적 위로와 평강을 얻고 자신의 성품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여기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또 그래서 세상적인 방안에도 일리가 있고 배울 점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미 기독교 신앙이 아니기에 세속의 방안으로 소기했던 성과를 얻었다 해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신자는 바울처럼 온전한 실천은 아직 못해도 앞에 인용했던 그런 고백들은 있어야 합니다.

범신론의 문제도 같은 맥락으로 접근하셔야 합니다. 인격적 존재가 아닌 신들은 세상만사를 통치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운행하는 법칙을 두고 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과 인간을 이끌어가는 목표와 방향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한 개인의 삶과 인생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범신론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합동사역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그 죄인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일에 불러서 동역자로 사역할 일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왜 범신론이 틀렸는지 왜 인격신이 맞는지 변증은 사실상 의미가 없고 또 불가능합니다. 인격적 신은 그 신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체험이 없는 상태에선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신의 실존조차 인정하지 못합니다. 한 절대적인 인격자가 당신만의 고유한 목적을 갖고 이 땅을 창조하고 모든 피조물을 그 목적에 따라 일일이 간섭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않고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신자들 중에도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속속들이 알고 내 인생을 당신의 거룩한 뜻대로 이끌고 있다는 진리를 체험적으로 생생하게 절감하고 있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교리로 배워서 인격적 신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 동행은 물론 관계조차 형성되지 않았기에 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지도 믿는 것도 아닌 셈입니다.

인격적인 절대자 창조주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이라도, 사실은 아예 실존하지 않고 인간이 고안한 것에 불과하지만, 인간과는 아무런 실제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요컨대 인간도 그냥 자연의 하나 즉, 물질이나 짐승으로 시작해서 물질과 짐승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환생을 믿고, 인간이 신이 되고 신도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우주 운행의 원리를 깨닫거나 신과 합일(合一)하면 구원받는다는 등의 온갖 사설(邪說)들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다시 강조하지만 인격적인 신은 그 분을 인격적으로 대면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분이 성령을 내주케 해주심으로써 매일 말씀과 기도로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 동행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신자가 행해야 할 두 가지 일을 수행할 수 있게끔 하신 그분의 배려입니다.

역으로 말해 종교를 갖는 이유가 이 땅에서의 자신만의 현실적인 형통이 목적인 사람에게는 인격적인 신은 필요 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자기 뜻대로 안락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데는 전혀 관심조차 없기에 인격적 신이 존재할 가능성조차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범신론자들에게 인격적 신을 납득시키고 싶다는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고 또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만은 신학적 종교적 교리적 이론을 아는 것과 실질적인 신앙생활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또 다른 이단들을 설득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론을 맺자면, 첫째로 정말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고 있는 신자에겐 세상의 모든 학문 종교 사상들이 자연히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직 그분의 의를 실현할 방법으로 순전히 사용한다 해도 성령이 함께 하지 않아서 실제로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둘째로 범신론자들에게 인격적인 신에 대해 변증 설득하려는 것은 결론 없는 논쟁만 낳습니다. 창조주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까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순전히 전하면서 그분들의 미혹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20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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