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22)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인은 언제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가? 첫째, 죄가 있을 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죄책으로 고통당한다. 둘째, 결백함으로 고통당할 수 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삶의 고난이 닥쳐올 때, 이렇게 고난당하는 자는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 셋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항상 죄책으로 고난을 당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죄가 있을 때,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주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상황이다. 그는 형벌을 당하고 있는 범죄자다. 물론 그 중에서 자신이 죄책으로 고단당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는 강도는 회개하는 강도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 이 죄 많은 강도처럼 회개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떠밀어버리고 싶어한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환경 탓을 한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이대며 변명한다. 이렇게 할수록 뻔뻔스럽고 건방진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둘째 범주는 결백으로 고통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불행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는 것이다. 언제나 옳은 길을 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있다면 욥이다. 그는 이 시험을 당했지만, 통과한 자다. 욥이 죄를 지어 고난당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욥이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면, 건방진 것이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도 욥을 자랑스러워하신다. 마치 하나님이 욥만 편애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욥을 자랑하며 사탄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욥 1:8)!”
인간적으로 말해, 욥은 결백한 자로서 고난당한 것이다. 친구들은 그를 꾸짖을 만한 어떤 범죄도, 어떤 과오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지속적인 잘못이 있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들의 생각보다 영원히 더 높다(사 55:8-9).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관계처럼 어떤 특정한 잘못이 있을 때만 잘못을 범하는 그런 관계일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는 사람이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자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런 저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가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을 믿는다면, 인간은 가장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죄가 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히 확정적으로 고정되어야 할 생각!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서는 영원히 고정되어야 한다. 이 생각은 시험을 당하거나 잠정적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생각을 시험하려는 자에게 화가 있다! 이 생각을 입증하려는 자에게 화가 있다! 절대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싸우지 말라. 이것은 죄 위에 죄를 더할 뿐이다.
사람이 모든 일에 옳을 수도 있다. 세상에서 언제나 의로운 일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자라고 표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표창을 받은 의인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책이 있다. 그는 죄인일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올바르게 싸우는 법이다!
여태껏 가장 앞도적인 우월성으로 반역자와 싸우고 있었던 가장 강력한 왕도 여전히 그의 편에 있는 그가 소유한 강력한 군대의 도움으로 싸운다.
그러나 하늘의 하나님은 공격을 공격자의 편으로 이동시켜 싸운다. 의롭다고 생각한 자가 반역자처럼 하나님을 공격하기 원할 때, 죄의 자각은 이 반역자를 공격한다. 다시 말해, 공격자는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과 거룩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이 가장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전히 비교니까. 그러나 이것은 어떤 비교도 금지하는 것인 바, 누구도 감히 하나님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범주였고, 오늘의 주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항상 죄책으로 고난당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잘못이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믿어야 한다.
만약 이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고통당하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옳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하나님은 잔인한 폭군이 아니다. 마치 형사처럼 죄를 찾다가 죄인을 벌하는 분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 거짓이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무엇일까? 물론,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로 고난당하기를 원했고, 이것을 인정하기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게다가,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백한 자로서 고난당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표준도 없다!
나중에 욥은 회개한다. 욥의 친구들이 생각한 것처럼, 욥의 회개는 이런 저런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오히려 욥은 하나님 앞에서 더 근원적인 죄에 대해 고백한다.
인간은 그가 아무리 결백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책으로 고난당한다. 이때 영원히 확고히 고정되어야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이 생각으로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이 생각은 될 것이 이미 된 것이다. 이 생각은 사람의 의지니까.
이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결심한 사람의 의지이며, 결심하여 위험을 깨달은 사람의 생각이지만, 또한 결심하여 승리와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의 의지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