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23) 길을 걷는 방법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생을 길로 비유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인생의 여행을 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는 누구나 “인생 길”을 걷는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따라서 이 길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길이라기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길이다. 이 길은 모든 각 개인들에 의해 시작되고 끝이 난다. 곧, 이 길은 이 길을 걷는 “방법” 혹은 “태도”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길로 비유했을 때,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는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조상들 역시 이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증거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이 세상에서 여행자로 살았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하늘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았다.
그때 우리는 언제나 묻는 것이 있다. 저 하늘로 인도하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지혜는 반복적으로 묻는다.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그 자체가 기만이다. 단지 인생을 길로 비유했을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생을 길로 비유했을 때에는 인생은 “그 길을 걷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주님이 말씀하신 강도만난 자의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은 누가복음 10장 30-37절을 보라.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에 한 길이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이 이 길을 따라 걷는다. 그는 평화로운 나그네였다. 아마도 심부름을 하기 위해 걸었든, 일을 하러 나가기 위해 걸었든 평화로운 나그네는 합법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은 “같은 길을 따라” 걷고 있었던 강도였다. 그러나 그는 불법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제사장이 “같은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그는 강도에 의해 공격당해 거반 죽어가고 있는 가엾은 불행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아마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했지만 그의 일상적인 경박한 길로 갔다. 순간적으로만 감동을 받고 가슴이 뭉클했지만 깊이가 없었다.
다음으로, 레위인이 “같은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뭉글하지도 않는 채, 거기를 지나 걸어갔고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갔다. 여전히 “같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레위인은 자신의 길, 이기심과 냉혈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인이 “같은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그는 긍휼의 길에서 가엾은 불행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긍휼의 길을 걷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모범을 통해 입증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길이 정확히 사람이 길을 걷는 방법이라는 것, 이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배우는 자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한 이유이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인처럼 그 길을 걸을 때, 당신은 긍휼의 길을 걷고 있다. 왜냐하면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길은 긍휼을 실천하는 것과 관련해서 어떤 장점도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건은 “같은 길”에서 발생했으나 한 사건은 합법적인 길이었고, 두 번째는 불법적인 길이었고, 세 번째는 경박한 길이었고, 네 번째는 냉혈한 길이었고, 다섯 번째는 긍휼한 길이었다. 복음에 의하면 “같은 길을 따라” 걸었던 다섯 명의 나그네가 있었고 각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따라서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길을 걷는지”에 대한 영적인 질문이 차이를 만들고 길에 대한 차이를 빚는다. 인생이 사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이해될 때, 길과 비유될 수 있고, 그때 은유는 단순히 보편적인 것을 표현한다.
곧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 정도로 그들은 모두 인생길을 걷고 있고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진지한 문제”일 때,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생 길에서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 사람은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나그네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듯 묻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 길을 따라 어떻게 걷는지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묻는 것이 우리에게 하등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럼에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묻고 있는가? 진리의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길은 어떤 비밀스러운 길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다.
마치 진리의 길이 대단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예언자나 기도로 단련된 목사나 교수에게 보이는 특별한 길로 만들지 말라. 진리의 길이 어떤 특별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는 길로 만들지 말라.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하지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되기 위해 그 길을 걸었던 사마리아인의 길, 긍휼의 길을 생각해 보라.
누가 그 길이 진리가 되도록 걸었는가? 누가 그 길이 생명이 되도록 걸었는가? 사마리아인을 제외하고 누가 그 길을 갔는가? “나는 제사장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나는 레위인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평신도입니다. 저는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신학교 교수도 아닙니다. 저는 저 비유에서 말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역시 사기고, 기만이다. 왜냐하면 복음에 의하면, 믿는 자들은 결국 모두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벧전 2:9).
누구도 이 길을 걷는 데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는 인생길을 걷는다. 누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길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길을 걷는 방법, 태도의 문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방법이 무시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지혜를 따른다.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그 길은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길을 걷고 있다.
다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길이 진리의 길임을, 생명의 길임을 “살아냄”으로써 입증하라! 현실적 삶으로 입증하라!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