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 유일하게 칭찬받은 서기관에 관하여
1. 본질의 평수는 물질 평수의 지배를 받는가
극히 개인적인 관찰이지만, 큰 평수(坪數)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이웃은 밝게 인사를 잘하는 반면, 작은 평수에서 마주친 이웃은 인사는커녕 눈초리마저 삭막한 것 같다. 이웃에 대한 미소는 주거 평수에 비례하는가? 이 관찰이 못된 편견이라면, 누구나 평수에 관계없이 미소를 띨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미소가 모든 소유의 평형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 관찰은 타당하다. 이 서기관의 질문과 답변은 바로 이 본질의 축소와 확대를 다룬다.
2. 율법의 평수(계명의 확대와 축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서기관의 질의는 무심코 한 질문 같지만 매우 어려운 명제이다. 흔히 613가지라 불리는(혹은 그 이상의) 수많은 율법 조목의 축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첫 번째 계명’ 즉 서수(序數)로 묻고 있지만, 다른 곳에선 실제로 평수(坪數)로 묻는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이 본질 축소 문제가 상당한 난맥상이었던 사실이, 이 서기관 본문의 여러 사본들뿐 아니라 공관복음에도 잘 나타나 있다.
613가지 세칙은 십(10)계의 확장이다. 반대로 10계가 613계의 축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축소를 시도한 것이다. 단 2개의 계명으로. 이러한 시도는 랍비니즘 유대교의 일반적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계명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서, 서기관/율법사로 등장하는 랍비들이 이 축소 행위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초대교회가 이 두 계명마저 1개(1평)로 축소를 시도하면서 발생한다.
‘하나님 사랑’이냐, 아니면 ‘이웃 사랑’이냐.
복잡한 율법에 대한 이런 단순화는 지키기가 쉬워진 개혁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다 어려워진 논제를 야기시켰다.
마치 우리가 613평에 살다 단 1평으로 쫓겨났을 때, 웃음을 띠기가 어려운 것처럼.
3.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 = 이웃 사랑(?)
유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줄이는 이 급진적인 행위를 가장 급진적으로 잘 해내고 있는 저자는 마태라는 인물이다.
아예 질문 자체를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평수로 묻고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하나님 사랑하라!)와 둘째(이웃을 사랑하라!)를 데 호모이아(δὲ ὁμοία)로 한데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데 호모이아(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선포하고선
[그와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게 되면,
이는 사실상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급진적 명제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계명은 둘이지만, 하나로 소급해내는 기법이다.
이 ‘이웃 사랑’ 우선 명제는 타자를 정죄하는 권능이 탁월하다.
613가지 이상의 ‘하나님 사랑’은 사실상 측정 불능에 빠지지만, ‘이웃 사랑’ 단일 명제로의 축소는 공간이 좁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침범 노출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이 1평에 나말고 누구를 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마태의 명제는 타인을 정죄하는데 쓰는 게 아니라, 자기를 정죄하는 데만 쓰는 법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
하지 않던가.
(교회 때리기 좋아하는 애들이 이 돌을 자기 아닌 교회를 향해 던지길 좋아한다.)
4. 서기관이 칭찬을 받은 이유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이 서기관이 이런 본질 축소의 과정에 있어 칭찬을 받은 이유는 그가 율법의 평수를 축소하는데 관심하기보다, 그 실행의 방도를 축소해냄으로써 본질에 더 잘 근접하였던 까닭이다. 다이얼로그를 한 번 보면,
서기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보다시피 이 서기관은 예수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있다. 예수께서 ‘마음-목숨-뜻-힘’을 다하라 한 것을, 그는 ‘마음-지혜-힘’으로 축소하고 있다. 이러한 축소 행위를 예수께서는 센스 내지는 재치(νουνεχῶς)로 보셨다고 기록한다.
어떤 부분이 재치로 보였을까.
본래 예수께서 인용한 언명은 신명기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이다.
당초 ‘마음-성품-힘’이었던 것을
예수께서 ‘마음-목숨-뜻-힘’으로 확장하였던 것인데,
신명기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이 서기관은
‘마음-들음-힘’으로 즉석에서 축소를 해냈던 것이다.
한글에서 ‘지혜’로 번역한 쉬네세오스(συνέσεως)는
지혜라기보다는 ‘이해’ 또는 ‘들음’인 까닭이다.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
결국 율법이나 조문의 개수를 축소/확대함으로 하나님 사랑에 완성을 다하려는 게 아니라, 효과적인 실천에 관심함으로 율법의 진정한 단순화에 이바지한 것이다.
예수와 서기관의 이러한 유연성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하나님 사랑의 준수를 가능케 했다.
마태는 하나님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 옮겼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의 심장 전체 안에서
너의 영혼 전체 안에서
그리고 너의 마음 전체 안에서*”
[* εν + 여격]
그런가 하면 마가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라 옮긴다.
“너는 사랑하라 주 너의 그 하나님을
너의 그 심장 전체로부터 밖을 향하여
너의 그 영혼 전체로부터 밖을 향하여
너의 그 마음 전체로부터 밖을 향하여
너의 그 힘 전체로부터 밖을 향하여*”
[* εκ + 속격]
※참고 이미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라 하였다. 평수가 크면 용서를 비는 자로서보다는 언제나 용서를 하는 자로서 자처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평수가 적은 자는 사실상 용서를 베풀기가 어려운 법이다. 용서받아야 할 자가 자신을 용서 베푸는 자로 자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평수가 적은 자는 언제나 ‘이웃 사랑’으로부터 고립이 된다. 노예도덕이 되기 십상이다. 바로 이럴 경우에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다다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지만 ‘하나님 사랑’은 언제나 ‘이웃 사랑’에 다다르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창동의 <밀양>은 ‘하나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고 꾸민 이야기의 전형이라 하겠다. 다만, 인본주의 유물론적 사랑에는 기여도가 있다. 유물론에 무슨 사랑이 있겠는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