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24) 만사형통의 개념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는가? 예수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착각은 지금은 고난당하고 어려워도 언젠가는 형통하리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런 ‘형통’의 개념에는 언제나 함께 하는 생각이 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고통당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찬송가 가사에도 나타난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지금은 고통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형통한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 속에서 형통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라. 아마 다른 곳에서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도, 요셉의 형통에서 실족하게 될 것이다.
요셉은 인신매매를 당하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독실한 한 교인의 자녀가 인신매매를 당했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뉴스에 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녀가 더 억울하게 죄를 짓지 않고도 교도소에 갔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을 ‘만사형통’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성경은 요셉이 인신매매를 당해서 노예가 되었을지라도 ‘형통한 자(창 39:2)’가 되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억울한 자가 되어 옥에 갇혔을지라도 ‘범사에 형통(창 39:23)’했다.
바로 이 말을 정확히 우리말로 하면 ‘만사형통’이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사형통이라 말하겠는가? 당신의 자녀가 인신매매를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것, 그것이 만사형통인가?
성경은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어 형통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희한하게 오직 세상에서 일이 잘 풀렸을 때만 형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오직 성공의 도구로 신앙을 선택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보혈을 빨아 먹는 흡혈귀 같은 행동인가를 생각해 보면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곧, 이런 사람이 신앙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성공의 도구로 십자가를 이용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요한과 야고보의 엄마가 와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우리 아들 중에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혀달라고 청탁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언제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겠는가!
허구한 날 성공만을 꿈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과연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만사형통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나를 보고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마 11:6).
하지만 실족하지 않는 자가 있었는가? 당대에 모든 사람들은 실족했다! 나는 절대 실족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 역시 실족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마 26:31).”
“아닙니다, 주님. 저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마 26:33)!”
여기에서 원래 ‘버리다’는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실족하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이다. 결국 제자들도 다 실족하고 주님을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만사형통인가?
이제 성경에서 ‘환난’을 찾아보라. 당신은 성경에 믿는 자가 당할 수밖에 없는 환난이 얼마나 필연적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한 번이라도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한국어 성경에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는 단 한 건도 검색되지 않지만, 환란은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형통을 설교하는 설교자의 맹점은 “지금은 고통당하지만 나중에는 형통하리라”는 결론으로 언제나 귀착된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이때는 이런 설교에 물들지 않도록, 그래서 이런 말씀에 영혼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상한 갈대가 꺾이지 않도록, 이제는 이런 설교에서 귀를 막고 오직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설 수밖에 없는 혼탁한 시대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눈도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은 더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생각만은 정확히 붙들어 매기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는 바이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고난과 환난은 ‘필연’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에게 환난은 죽을 때까지 제거할 수 없다! 이것만큼은 절대적으로 영원히 확실하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
“우리는 환난을 당할 운명이다(살전 3:3-4).”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이런 이야기가 당시에만 해당된다고 믿는가? 오늘날 저런 이야기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 이야기를, 저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러면서도 구약의 형통만을 믿기 바라는 것은 나의 눈이 병든 것은 아닌가?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믿는 자의 ‘만사형통’은 일이 술술 풀리는 것,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의 형통이란 요셉처럼, 인신매매를 당해도, 억울하게 옥에 갇히더라도 그 현장을 변화시키는 것, 그 현장에도 하나님의 나라게 임하게 하는 것, 그것이 형통이다. 환난과 고통은 필연적이다.
믿는 자에게 환난은 제거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만사형통이란 환난 중에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풀이된다. 곧, 주님이 세상을 이겼듯이, 환난당할 때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
이때, 믿는 자는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기쁨에 대해 ‘고난의 복음’ 다섯 번째 설교에서 말한다. 다음 시간은 이 기쁨을 살펴볼 차례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