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어정쩡한 고백과 손 씻기, 그리고 최후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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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의 성화(聖畵)와 실화(實話)] 빌라도의 고백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도상은 미래에 도래할 심판이 아닌, 현재에 일어나는 그 로고스 심판의 전형이다. 그리스도/ 로고스를 중심으로 상하좌우 사방에서 동시에 심판이 일어나는 최초의 도상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도상은 미래에 도래할 심판이 아닌, 현재에 일어나는 그 로고스 심판의 전형이다. 그리스도/ 로고스를 중심으로 상하좌우 사방에서 동시에 심판이 일어나는 최초의 도상이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두 번 묻는 심문 장면이 있다.

여기서 답을 이렇게 한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본래 “Σὺ λέγεις ὅτι βασιλεύς εἰμι”, “너는 나는 왕이다라고 말한다”이다.

내용상 빌라도가 그를 왕이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의역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빌라도가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고백)했단 말인가?

1. ‘다윗의 유언’은 대개 열왕기의 시작 부분을 꼽으나, 진정한 유언은 사무엘의 책 마지막 부분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열왕기에서는 아들로의 사적 고지이지만, 사무엘에서는 계약 전통을 한층 포괄하기 때문이다. 둘째, ‘다윗의 마지막 노래’로 명명된 이 유언이 모세 신탁을 본뜨고 있기 때문이다.

2. 이를 테면, 초입의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 다윗이 말함이여…”, 여기에는 본래 동사가 한 개도 없다. 다 명사형 문장이다('말하다'가 아니라 ‘말’).

그것은 마치 신명기 첫 장의 시작이 오로지 명사형 문장으로써 모세가 말한 말(דָבַר) 자체를 신탁(הַדְּבָרִ֗ים)으로 모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신탁이라면 본래 신의 말씀인데, 신탁이 모세의 다바르(Logos)에 들어 있으니, 모세의 말이 신탁이 되어버린 원리이다.

3. 이런 원리가 바로 ‘다윗의 마지막 노래’의 형식이 된 것이다. 여기서 다윗이 맺은 ‘영원한 계약’은 전적인 다윗의 언어(다바르) 속에서만 존재한다.

가령 “다윗의 가문이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 같다”고 한 것은 순전히 다윗이 체험한 것이지, 우리의 경험이 아니다. 이리하여 모세의 로고스는 법화(法化)된 반면, 다윗의 로고스는 시화(詩化, 찬양)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라 부른다.

4. 자, 이제 응용을 해보겠다. 어떤 사람이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셔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게 하시고, 비 내린 후의 광선처럼 신학 공부를 하게 하셨어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그 학기 성적이 올(all) ‘D+’가 나왔다.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고.

5. 다음 학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이런 고백을 다시 듣는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셔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게 하시고, 비 내린 후의 광선처럼 신학 공부를 하게 하셨어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 학기에 올 ‘D+’뿐 아니라 ‘F’도 섞여 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의 말이 헛소리였음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은 “돋는 해의 아침 빛, 비 내린 후의 광선”을 전혀 맞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에게 보이려고 흉내를 낸 것이지 전혀 자기 말이 아닌 것이다. 한 번도 자기가 쓰는 말들의 로고스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이래 놓고 안수를 받겠다는(혹은 받은) 인간도 태반이다.

6. 이제 빌라도 차례이다.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두 번 물었을 때,

허무하게도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하고 예수께서 (너무나 쉽게) 답한 것처럼 돼 버린 것은, 번역자가 앞에서 빌라도가 고백한 대목을 명확하게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다.

본래의 뜻을 그나마 살린 번역은 공동번역 정도이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이것이다.

Σὺ λέγεις ὅτι βασιλεύς εἰμι εγώ.
“너는 ‘내가 왕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진행형)”

빌라도가 자기의 언어 속에 담긴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D+ 학점의 신학도가 자기도 모르는 꽃말들을 늘어 놓고 있는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예수께서
“그게 네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 말이냐?”
라고 물었을 때,

“내가 (무슨) 유대인이냐?!”
(Μήτι ἐγὼ Ἰουδαῖός εἰμι;)
하고 정색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빌라도는 피고가 아닌 판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빌라도의 어정쩡한 고백이,
손을 닦으며 책임 회피하는 세레모니, 또는 그의 아내의 증언과 결부된 전승을 낳게 한 것이며(심지어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중세의 위조문서까지),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저 유명한 테제,
“에케 호모(ecce homo, 보라! 이 사람을!)”의 발화자로서 이방인 지위에 빌라도를 상정하게 했다.

7. 그러나 빌라도의 저 고백은 자기 심판을 견인한다.

자신이 판관이요, 예수는 피고였던 관정이, 어느새 자신을 피고로 하는 심판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바로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고백, 곧 자기가 한 그 말(דָבַר)이 자기를 심판하는 관정이다.

결국 그는 십자가 팻말에 그분이 왕이라는 말을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3개국어로 표지한 장본인임에도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것이다.

8. 이것이 모세-다윗의 신탁(דָבַר)을 형성한 원리인 동시에 최후의 심판 원리가 되었다.

지금은 심판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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