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순교, 그 영광스런 발자취를 따르며
얼마 전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신사참배 80년을 보내며 일천만기도대성회를 열었다. 회개하고 기도하며 영적 대각성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신사참배라는 민족적 죄를 회개기도를 하고 순교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신(女神) 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이 침략에 나서며 일왕을 신(神)으로 삼아 숭배하게 된다. 그래서 한일병합을 자국의 신문에 한복입은 조선인 일본의 여신에게 절하는 그림을 묘사하며 대대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1920년부터 일제는 건국신과 메이지신을 모시는 경성 남산에 신사 신궁을 건립,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한 기부자들의 명부를 돌계단으로 만들어 ‘친일’과 ‘신사참배’를 영웅시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신사참배의 역사는 식민통치와 궤를 같이 한다. 일제강점기 자행된 신사참배는 민족적으로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와 동방요배, 우미유카바를 부르며 ‘국민의례’ 명목으로 진행됐고, 학생들의 일기장에는 매일 검열받는 일들이 계속됐다. 깊게 생각하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신사참배 강요는 1937년까지 학교에 대해서는 강경하면서도, 교회에 대해서는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교회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말부터 종파에 따라 쉽게 따르며 지도자들이 자신의 지위와 명예의 보존에 연연하여, 친일에 영합하는 자와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에 대한 폐교와 몰수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이때 한국교회가 학교와 각 교파들이 연합하여 ‘일사각오’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더라면, 이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용인하거나 도피하는 도피형과 타협하고 수용하는 타협형, 순교를 각오로 적극 불참하는 항거형 등 세 가지로 이상규 박사는 분류했다.
타협형은 일제와 타협하여 교회를 지키고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례 문제로 이해했다. 천주교와 감리교가 먼저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니라고 규정했고, 장로교도 대부분 수용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일부분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교회나 성도들이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당시 일제의 탄압에 200여 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성도가 투옥됐으며,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당했다고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밝히고 있다.
이 숫자는 당시 장로교의 3,000개 교회 35만 성도의 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타협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행동이 교회의 부흥이나 복음 전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도피형도 있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그것이 불법인 줄 알지만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서 마지 못해 동참하는 척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을 지켜 나가려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학업을 이유로 해외로 나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뜻 있는 인사들은 지하로 숨어, 한때 70만명에 이르던 개신교인들이 그 절반으로 줄어들기도 했다고 역사학자 김인수 박사는 전한다.
한국교회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해외로 떠나므로 다른 대안이 없는데 일부러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 중에는, 신학자 박윤선 박사도 있었다. 이런 도피형 가운데는 농촌으로 내려가 농촌운동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이 김용기 장로로, 그의 농촌운동은 의식계몽운동이자 또 다른 민족운동이었다.
그런가 하면 순교의 발자취를 남긴 항거형 순교자들도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소 30여명 정도가 옥중에서 순교했거나 출옥 후 고문이나 병약함으로 순교한 최봉석 목사 같은 이들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를 교파별, 지역별로 조사하여 펴낸 김승태 박사에 따르면, 평북에 고흥봉 목사를 위시해 24명, 평남에 김선두 목사를 위시해 20명, 황해에 박경구 목사를 위시해 10명, 함북에 김무생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를 위시해 31명, 경북에 이원영 목사를 위시해 20명, 충북에 송영희 목사를 위시해 2명, 전북에 김가전 목사를 위시해 5명, 전남에 강순명 목사를 위시해 46명, 만주에 계성수 목사를 위시해 26명, 일본에 김은석 목사를 위시해 8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감리교 강종근 목사를 위시해 9명, 성결교 김기삼 목사를 위시해 11명, 동아기독교 김영관 목사를 위시해 12명, 안식교 최태현 목사 1명으로, 총 229명이라고 한다. 이중 옥중에서 혹은 풀려나서 순교한 사람이 29명이며, 그중 장로교에 속한 사람이 18명이고 기타가 11명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신사참배 반대로 항거하다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옥에서 순교로 영광스런 발자취를 남긴 장로교 목사는 이기풍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허성도 목사, 박연세 목사, 양용근 목사 등 6명이며, 장로에는 박관준 장로가 있었다. 그들은 분명 거짓과 불의한 사회와 변절한 교회에 대하여 온 몸으로 경고한 예언자적인 신앙의 용장들이었다.
어떻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이런 선배들의 숭고한 순교정신을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처럼, 1866년 9월 5일 영국의 토머스 선교사가 북한 평양의 대동강 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이래 2,600여 명이 뒤를 이어 숭고한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발전 뒤에는 이처럼 신앙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신사참배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변절’과 ‘순교’의 의미를 오늘에 다시 짚어보고, 그들의 감당했던 신앙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순교신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재조명하는 일은 건강한 한국교회의 영성과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 민족적 죄를 회개하고 순교정신을 다시 회복하려 한 것이나, 이번 일을 계기로 감리교가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회개 대열에 앞장섰다는 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강종근 목사와 양용근 목사와 주기철 목사를 기억하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담아 순교자 추서패를 전달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