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7)
*본지는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Ph. D.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의 논문 '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3. 삼일운동의 정신
1) 삼일독립운동과 그 선언서를 통한 정신
3.1운동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지도층과 민중이 합세하여 봉기한 혁명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 후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도전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었고 약소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새로운 사회로 변화해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역류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시대착오적인 역사의식을 질책하고 양심의 주체성, 천명의 궁극성, 시대정신의 세계 성을 지니고 있었다. 주체적인 양심에 바탕을 두고 천명과 세계역사의 큰 흐름을 따른 운동이었다. 3.1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의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독립의 선포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3일에 탄생되었다. 한성정부도 세워졌다. 이는 한국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와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것이었다. 삼일정신으로 일제 때는 지속해서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고 1945년 해방을 맞아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에는 건국의 정신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3.1절이라 하여 4대 국경일 중 하나가 되었다. 3.1운동은 세계사적으로 식민지 세력에 저항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의 물결을 되돌리려는 투쟁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3.1운동의 정신은 행동으로 보여준 것 외에 3.1 독립선언서에 더 잘 표현되어 있다. 선언서는 그 종류만 대략 33종이다. 국내에 11종, 미국에 3종, 러시아에 1종, 일본에 2종, 중국에서 16종이 나왔다. 기독교인 주도한 선언서도 12종이나 된다.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단재 신채호 이후 3.1정신에 대한 추구와 참여 층의 구성 및 독립선언서 분석 중심으로 진척 되었다. 그 외는 주로 민족대표와 참여 층의 공과에 대한 논의 위주였다. 1990년대 전후한 삼일운동 연구는 민중운동을 중시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3.1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국에 계속 일어날 수 있도록 독립선언서 자체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우선 어려운 문장이어서 지성인 지도자급은 문제가 없었지만, 민중들이 이해키 어려웠던 데도 내용적 깊이와 대중적인 호소력이 있게 기록되어 누구나 감동할 수 있게 기록되었다. 민중들이 독립은 절실하지만 막연한 감정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의식을 구체화시켜 조리 있는 상징체계로 형상화해서 민중들이 확신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두 그룹 모두 공감한 것은 누구든 읽는 사람에게 박력 있게 느껴지고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정신은 타종교와 일치하는 내용도 있고 비 기독적 요소도 있다. 또한 근대 서구사상의 개념과 기독교 사상과 일치하는 기독교정신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선언서의 필자는 최남선인데 당시 그는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실력행(務實力行)을 주창한 안창호의 교육입국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본다.
3.1독립선언서에는 독립운동의 이념이 제시되었다. 선언문에 나타난 삼일정신은 자주독립, 정의, 인도, 생존, 존영, 평등, 평화였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의 서구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일제를 향해 선언은 겨레의 미래를 향한 방향의 제시이기도 하였다. 자주 독립, 민족 자유, 인간 존엄성의 확립은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표였다. 국권회복과 아울러 민족의 자주독립, 겨레의 미래 진로에 대한 정신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 기본적인 정신은 자주 독립이었다. 한국민족의 기본권의 회복을 위한 외침이었다. 일본의 무단정치, 군국주의에 의한 탄압과 강압정치로 기본권마저 완전히 빼앗기고 말살당한 것과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를 지향 한 것이었다. 우리의 기본권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다시 찾아야 하며, 자유를 얻어야 되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프랑스혁명 때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삼고 부르짖던 것처럼, 3.1운동도 자유정신, 도의정신, 인류박애정신, 평화정신을 세계에 선포하여 한민족의 정당한 권리임을 선포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