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화 복음’으로서의 ‘성탄절’
부산시에서는 지역교회들이 연합하여 ‘부산시민 트리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10년째 성탄축제를 열어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예상외로 반응이 너무 좋다.
서울에서는 시청과 국회앞에 트리를 점등하였고, 청계광장에는 등불축제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을 열어 관심을 끌었다. 이런 성탄축제가 더 활성화되고 서울, 경기,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지역마다 더 확산되었으면 한다.
역사의 지평을 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전하고 그 분의 오심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그 분을 만나도록 전하는 문화로서의 복음이 ‘성탄’이 아닐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문화 복음으로서의 ‘성탄절’은 참으로 소중하다.
우리나라의 첫 성탄소개는 서재필 박사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이 만들어진 그 해였다. 1896년 12월 24일자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는 성탄 소개 기사가 처음으로 실렸다. 한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성탄절을 소개하고 기념한 곳이 <독립신문>이었고. 당시 크리스마스를 ‘휴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듬해 10월 정동에 한국의 첫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설립된 후, 1897년 12월 25일 언더우드 선교사는 성탄절 주일 예배에서 한국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을 거행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도 아이들을 모아 성탄절에 대해 전했고, 양말에 선물을 담아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소년들은 산타클로스가 준 선물로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이날 김명옥에게 첫 여성 세례를 베풀었다.
성탄절기가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의 집으로 평소 고마웠던 분들이나 교인들을 초청하여 성탄절기를 보내며, 초대받은 이들에게 성탄의 의미를 전하고 음식을 베풀며 즐거워했다.
그때 스크랜턴 선교사도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고, 한국의 첫 산타클로스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첫 번째 성탄절 모습이었다.
그런가 하면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하여 부부 선교사가 된 릴리아스 홀턴 의료 선교사가 쓴 <상투의 나라>에는 첫 성탄트리를 1894년 궁중에 설치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종 황제의 왕비 명성황후를 치료하며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명성황후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홀튼 선교사는 매번 가마를 보내 궁정으로 초대하는 황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소나무와 촛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궁에 설치하며 크리스마스를 선물했다.
그녀는 기독교 전파의 가장 적절한 문화적 방법으로 ‘성탄절’을 택해 알렸을 뿐 아니라, 진료소를 설치하여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였으며 여성성경반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계몽하기도 했다.
1896년 <대한 그리스도인회보>에 보면, 최병헌 목사는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속이 점점 흥왕할 줄로 믿노라”며 성탄 문화 확산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배재학당의 성탄절이 <독립신문>과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소개되는데, 이 행사는 대한제국 첫 공식 성탄절 행사라 할 수 있다. 주로 연등을 달고 성탄극을 공연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1898년 12월 27일자 <대한 그리스도인회보>에 따르면, 이렇게 전파된 성탄절이 한국인에게 중요한 축일로 정착했다는 평가가 이뤄진다. “서울 성 안과 성 밖에 예수교 회당과 천주교 회당에 등불이 휘황하고 여러 천만 사람이 기쁘게 지나가니 구세주 탄일이 대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더라.”
성탄절 행사를 교회교육에 적용하고 전파하는데 앞장 선 이가 정동감리교회 한석원 목사이다. 그는 성탄 성극을 만들기도 하고,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널리 가르쳐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1900년대에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성탄절에 사람들이 교회당에 몰려드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선교차 방한했던 노블 부인의 일기 <승리의 생활>에는 “회당문이 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밝혔다. 백성들은 성탄절에 교회당에서 행해졌던 성탄극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전통적인 명절과는 다른 축제일의 성격을 띠어갔다.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구세군 자선냄비는 1928년부터 성탄절기에 맞춰 모금을 전개하였다.
우리나라의 첫 크리스마스 씰은 카나다 의료선교사로 온 셔우드 홀 박사가 결핵의 예방과 계몽을 위해 도입했다. 그는 1932년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에 조선인의 자랑인 거북선을 그려 넣었다.
그는 거북선의 포를 결핵마크에 조준하여 결핵을 무찌른다는 의도로 디자인을 만들었으나, 일제 치하에 저항정신이 담겨있다는 이유 때문에 남대문으로 교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런 성탄절기 문화는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자리 잡기 시작됐다.
1936년 <매일신보>에는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러던 크리스마스는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규제 하에 철퇴를 맞으며 수그러들었고, 크리스마스의 자유와 기쁨을 잃어버린 채 우울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은 평소 야간통행 금지를 실시했으나, 성탄절과 12월 31일에는 예외를 적용했다.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성탄절을 휴일로 법제화했다.
6·25 전쟁 기간 중에는 미군들로부터 그 의미가 새롭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전쟁의 영향은 성탄절을 일제강점기의 소비와 여흥의 문화에서,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을 위한 기쁨과 축복의 날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쟁 이후 경제발전과 유신정권이 들어서며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기,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새벽송은 자유와 기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2년 1월, 야간통행 금지가 풀리면서 그 의미도 크게 퇴색됐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연말연시엔 춥고 배고픈 이웃에게 나눔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어졌다.
이렇듯 한국교회가 전할 문화 복음의 콘텐츠는 ‘성탄’과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과 그분의 부활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 중의 복음’이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