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 (27) 환난이 길이라고 믿으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환난의 길을 싫어한다. 환난이 온다는 것은 인생에서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이다.
환난이 닥칠 경우, 그 길로 가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아마 함께 하는 사람들조차 환난이 올 때 계속 전진해야 할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기도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환난이 길인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환난이 제거되면 길이 사라진다. 환난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환난의 길’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환난의 길은 마치 길과 환난을 분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환난의 길을 걷지만 언젠가는 환난의 제거되고 탄탄대로가 열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런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환난 자체가 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싫어할 것이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믿었던 믿음의 체계가 아닐 것이다. 환난이 길이라기보다, 환난은 인생길을 걷는 데에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환난을 대할 때는 정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기존의 갖고 있었던 생각과 개념부터 바꾸라.
환난은 길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 환난과 길을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환난이 없어질 것이다? 천만에. 이 길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의 길을 걷는 자는 언제나 환난을 당한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듯 그리스도인들은 환난당할 운명이다(살전 3:3).
둘째, 환난은 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운송 담당자다. 환난이 길이라면, 환난은 그 길을 걷는 자를 어딘가로 인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환난은 우리를 안내하는 환상적인 팀이다. 환난이 다스리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이 환난이 닥친다면, 이것은 불길한 징후가 아니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최상의 징후다. 그러니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아이가 여전히 선생님을 두려워하는 한, 아이는 확실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신뢰가 두려움을 내어 쫓고 담대한 확신이 이길 때, 그때 최상의 교육은 시작된다.
환난이 길이라고 확신하면서 고난당하는 자가 환난을 정복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가장 고차원적 의미에서, 환난이 길이고 조력자라고 믿기를 원하는 것은 환난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에 의하면,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다(요일 5:4).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정복자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롬 8:37).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정복자보다 더 큰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적을 자신의 친구로 바꿀 수 있다면 그렇다. 환난 중에 정복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가 있다. 곧 환난이 자신의 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동안, 사람이 적을 정복하는 것처럼 환난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난이 자신의 친구라고 믿는 것은 정복하는 것보다 크다. 환난이 반대가 아니라 길이라고 믿는 것, 환난이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 환난이 낙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품격을 높여 주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은 정복하는 것 그 이상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으로부터 환난이 무언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난 외에 다른 어떤 것이 길이 무언가로 인도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으나, 이것이 이 길에 따라오는 어떤 반대로서 나타날 수 없다면, 그때 물론 이 길은 영원히 무언가로 인도해야 한다.
굉장하다! 환난의 길이 어떤 장애물도 없는 유일한 길이라니! 왜냐하면 길을 막는 대신에 환난 자체가 길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환난은 탄탄대로다! 이것은 얼마나 기쁜가!
나그네가 “거기에는 더 이상 길이 없어”라고 말해야 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여기에 항상 길이 있어!”라고 감히 언제나 말을 하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환난은 초인적인 것이 아니다. 환난이 초인적인 것이라면, 그때 길은 막힐 것이고 환난은 길이 아닐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인간적인 것을 제외하고 어떤 시험도 여러분들과 부딪힌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시험과 함께 피할 길도 주십니다(고전 10:13).”
그러나 하나님께서 환난 자체가 길이 되도록 영원 전부터 시험을 마련하셨을 때, 하나님은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닌가! 그때 환난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환난 자체가 피할 길이 되는 것보다 시험을 피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이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때 환난 자체가 언제나 피할 길이고 환난을 피하는 좋은 길이 되기 때문이다.
초인적인 시험은 사람에게 쌓이게 될 것이다. 히말라야 산을 생각해 보라. 마치 등산객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가파른 산처럼, 초인적인 시험도 고난당하는 자를 놀라게 할 것이다.
초인적인 시험은 시험의 크기와 비교하여 그를 설설 기는 자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자연의 힘이 사람의 노력을 조롱하듯, 초인적인 시험도 가엾은 고난당하는 자를 조롱하는 것처럼 자랑하며 거만하게 으스대며 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라! 거기에는 어떤 초인적인 시험도 없다. 거기에는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겁쟁이가 발명한 거짓된 우화만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시험을 확대시킴으로써 죄책감을 최소화시키고 싶은 겁쟁이들의 발명품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그 시험이 초인적인 시험이 되게 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은 교활한 자들의 거짓 아우성만 있을 뿐이다.
성서는 정반대로 말한다. 성서는 어떤 초인적인 시험도 없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연약하게 하는 예견의 공포에 대하여 성서가 말하고 있는 다른 곳에서, 성서는 믿는 자들에게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너희의 머리를 들라(눅 21:28).”
결과적으로 시험은 초인간적인 면을 갖고 있지 않다. 반면에, 환난이 가장 소름끼칠 때, 믿는 자는 머리만큼 더 크다. 머리만큼이다. 그는 진실로 환난 위로 들어 올리는 머리만큼 더 크다.
그리고 환난이 길이라면, 그때 믿는 자 역시 환난 위에 있다. 알다시피, 사람이 걷고 있는 길은 그의 머리 위로 가지 않지만, 사람이 길 위를 걷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발로 그 길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는 자는 초인적인 시험 앞에서 설설 기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환난이 길이라는 생각 속에 순전한 기쁨이 있다. 고난당하는 자는 즉각적으로 아주 특별하게 과업이 무엇인지 안다. 그는 즉각적으로 모든 힘을 다해 출발할 수 있다.
어떤 의심도 길과 환난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은 영원이 분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환난이 길이라고 믿으라!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