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설교] 미처 몰랐던 성탄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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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필진 중 한 명인 박진호 목사의 크리스마스 설교입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인 그는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박 목사가 운영하는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본지는 박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합니다. 아울러 필자의 요청에 따라, 글이 그의 웹페이지에 게시된 날짜를 맨 아래 밝혀둡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민35:9-15)

성탄절을 안 지키는 교회

지금처럼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켜온 유래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AD 350년에 로마 교황 율리오 1세가 이방인의 축제인 태양절을 없애려 제정했다는 것이다. 유력하다는 뜻은 로마연감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 년 중에 밤이 제일 긴 동지(12/22)를 지나면 낮이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한다. 당시 이방인들은 어둠이 끝나고 태양 빛이 들어온다고 12/25을 태양절로 지켰다. 율리오 교황은 어둠에 승리하는 참 빛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이자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님이기에 참 빛이 오신 날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님의 탄생일로 정한 것이다.

누가복음은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눅2:8)라고 기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로는 한 겨울은 추워서 밤에 밖에서 양을 먹이지 못한다. 성경은 12/25이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보수적인 교회에선 진짜 생일도 아니고, 이방인의 축제날이었고, 최근에 상업주의가 성행하는 세속의 명절로 변질되었다는 이유로 성탄절에 아무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

저 개인적으로도 크리스마스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나름대로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예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산타클로스가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관습 때문이다. 한 해 동안에 부모님 말 잘 듣고 효도하고 착한 일을 한 것에 대해 고무 격려하는 의미는 선하다.

하나님도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 상을 줘도 하나님이 주셔야지 왜 인간 산타가 주어야 하는지 기독교로선 용납할 수 없는 관습이다. 무엇보다 기독교 외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착한 자가 천국 간다는 선행구원으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히 생긴다.

둘째로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근본은 태초요 상고를 넘어서 시작과 끝이 없는 분이다. 그분에게 생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엄격히 말해 생일 자체가 없는 분이다.

죄에 찌든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영원하시고 거룩한 만물의 창조주 예수님의 생일을, 그것도 사실은 있지도 않는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개미가 인간에게 생일 케이크를 들고 와서 축하한다고 덤비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된다. 개미와 인간은 둘 다 피조물이기라도 하지만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간극은 인간 쪽의 어떤 선행과 노력으로도 매울 수 없다. 그분에게 인간이 바칠 것은 오직 하나 경배와 찬양뿐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12/25을 크리스마스로 지키는 전통은 유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성탄절이 위치한 그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기 때문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가 성탄절이다. 불신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 동안 만나지 못했거나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들고 찾아가 사랑을 나눈다. 이때만큼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의 이름이 많이 회자되는 시기가 없다.

또 모두가 한 살씩 더 먹는 때다. 그만큼 죽음에 가까이 간다는 의미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한번쯤은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기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무엇인지 고뇌하게 된다. 새해에는 좀 더 거룩하게 살려고 결단한다. 신년 초에 그래서 멤버십 숫자가 느는 곳이 둘 있는데 교회와 헬스클럽이다.

교회는 성탄절의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 단 교회 안에서 산타가 선물을 주는 행사는 중지해야 한다. 또 예수님의 생일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꼭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와 목적을 되새기는 주일로 삼아야 한다.

살인자를 구원하는 도피성

오늘의 본문은 구약의 율법이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의미를 아주 잘 드러내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살인했을 때의 구제 방안인 도피성에 대한 규정이다. 고의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이어지는 16-19절에 나온다. 철, 돌, 나무 연장 등의 살인도구를 소지했는지 또 평소에 피살자와 원한관계가 있었는지 여부로 판단한다. 반면에 우발적인 살인의 경우는 신명기 19:5에 한 가지 예를 들었는데 산에 나무를 벌목하러 갔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우연히 빠져나왔는데 옆의 사람이 맞아 죽는 그런 경우다.

살인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생명을 인간이 박탈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이자,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 당신을 살해한 꼴이다. 반드시 사형으로 엄중히 다스려야 할 죄다. 그래서 율법은 피살자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흘린 피를 다시 피로 갚을 수 있도록 즉, 죽일 수 있도록 했다.

단순히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아버지를 살해당한 아들이라면 바로 자신이 죽은 것과 같은, 아니 더 심한 죄악이다. 살인자가 이런 경우를 거꾸로 당했다고 치면 피의 보수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살인은 어떤 경우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 그만큼 서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과실치사를 범한 자는 도피성으로 피신해서 공정한 재판을 통해 실수라고 인정이 되면 그 사형에서 면제된다. 그런데 도피성으로 피신하기 전에는 피의 보수가 가능하다. 죄인은 자발적으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반드시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한다는 의미다.

도피성으로 피신하기 전에 자칫 억울하게 죽는 경우를 막고자 이스라엘 곳곳에 여섯 도피성을 설치했다. 그리 멀지 않는 근처에 피난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자는, 언제 주님 다시 오실지 모르고 또 언제 그 생명을 하나님이 앗아갈지 모르니, 무조건 지체 말고 가장 가까운 교회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도피성과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은 이 땅에 바로 이런 도피성으로 오셨다. 우리 모두, 모태신앙인 자는 빼고, 좀 더 실감나게 이야기 하자면 저는 하나님을 완악하게 외면 무시 거역했다. 그분의 반대편에서 세상 죄악과 짝하며 그분의 원수로 살았다. 고의적 능동적으로 거역한 것이다.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 소리쳤다. 이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뜻인지 그 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정확히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내 주먹 깜냥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주먹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으니 마음 놓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부재를 믿는다는 것은 내 스스로 그분을 내 마음속에서 지운 것이다. 하나님을 고의로 살해한 셈이고 그분이 피살자가 되었다.

영적으로 어리석은 것을 넘어 무지한 것도 아니다. 영적으로 시체였다. 그렇게 큰소리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오히려 잘하는 짓으로 여겼다. 예수 믿는 신자들을 나약하고 비겁한 위선자라고 비방 매도했다. 예수를 믿고 나서 되돌아보니까 저는 분명히 하나님을 고의로 살해한 셈이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피해자요 피살자가 되었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누구인가? 바로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이다. 그럼 성경의 율법뿐 아니라 도덕 종교 상식적으로도 그분은 피의 보수자가 된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으니 내가 죽어야만 합당하고 논리적 순서에 부합된다.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하셨는가? 당신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 당신의 몸을 던져 저의 도피성이 되어주셨다.

이는 인간의 어떤 사상, 도덕, 종교로도 말이 안 되고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인간 이성으로 이해도 안 된다. 오직 성령이 간섭하여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새로운 영을 창조해주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이다.

또 이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으면 그 진리 앞에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당신의 전부를 나를 위해 던지신 그분 예수님께 이제는 나의 전부를 바치는 것만큼 인생에 큰 복은 없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고 더 기쁜 소식도 세상에는 없다.

실수로 살인하여 무죄가 입증되어도 남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엄청난 과오다. 그래서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언제든 피의 보수를 당하게 된다. 반드시 도피성 안에서만 거주해야 한다.(25-28절)

신자도 구원 이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계속 머물러야만 새로 얻은 새 생명이 힘을 얻고 유지 성장할 수 있다. 참 빛 안으로 들어온 자가 다시 어둠의 세력과 타협 수용 융화할 수는 절대 없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일을 중지하거나 나태해지면 그냥 조금 덜 경건하거나 중립적 백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 모두 경험하듯이 곧바로 죄악에 쓰러지게 된다.

특별히 25절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 안에 거주해야만 하고 그 후로는 도피성 밖에 나가도 피의 보수는 할 수 없다.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대제사장은 물론 예수님을 상징한다. 신자의 일생은 예수님과 연합해야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님이 완전한 용서를 해준 것을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구약의 동물 희생 제사나 본문의 도피성 제도는 예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이다. 구약의 구원에는 여러 조건이 수반되었다. 그런데 피의 보수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오히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제물로 하나님께 영단번의 제물로 바쳐졌다. 구원의 모든 조건이 제거 되고 일시적 단회적 구원이 영원한 구원으로 바뀌었다. 완전한 구원이기에 완전한 자유가 따른다.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 구원의 취소는 절대 없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있다. 바로 이 피의 보수 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고 자력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0.0001%도 없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이 어느 날 먼저 찾아와서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그분과의 일대일 인격적 대면의 체험이 있어야 하는 것 외에는 구원에서 그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 그마저도 원수였던 자를 주님이 먼저 찾아와주셨듯이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일뿐이다.

너무나 귀한 구원의 원리

이런 너무나 귀한 구원의 원리를 본문 15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자손뿐 아니라 타국인과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사람에게까지 해당된다.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조치처럼 여겨선 안 된다.

미국의 오래 전 엘에이 폭동의 발단이 무엇이었나? 흑인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 여럿 명이서 무차별 구타한 사건 때문이다. 외국인도 아니고 미국 시민권자였다. 그가 범죄 용의자이긴 했지만, 만약에 현장에서 잡힌 살인자가 백인이라면 체포하려는 경찰에게 대들었다 해도 분명히 그렇게까지 구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때렸다. 그것도 일반 대중이 아니라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할 관리가 그랬다. 수백 년간 노예로 착취한 죄책감 때문에라도 결코 그래선 안 되고, 같은 조건이라면 더 우대해주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우리 모두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 중에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만큼도 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점을 모르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기본적 이성과 체험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영적으로 둔감해도 죄를 지으면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런 점을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겉으로는 교양과 지성과 윤리와 종교 등으로 화장이 아니라 변장을 한다. 화장은 원래의 모습에서 조금 더 좋게 만드는 것이다. 변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선 하늘을 향해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큰소리만 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다.

하나님은 본문의 규정을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주셨다. 거류자는 미국으로 치면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에 해당된다. 그런데 구태여 타국인이라고 별도로 또 언급했다. 여행으로 잠시 방문했거나 불법체류자를 말하며 그들에게도 도피성 제도를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평가하고 대우하고 통치함에 있어서 당신 쪽에선 단 하나의 잣대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쉽게 이렇게 생각해보라.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는 일본인이 고의는 물론이고 우발적으로 예컨대 술에 취해 한국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지금 한국사태보다 더한 촛불 행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당장에 사형시키라고 아우성칠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 중에는 신자와 목사도 다수 포함될 것이다.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

예수님은 바로 그런 상태의 이 땅에 그 데모하는 군중은 물론이고 살인자 일본인까지 용서해주러 오셨다. 로마 백부장의 하인과 비천한 이방여인의 아들을 생명을 구해주었다. 사형을 받아 마땅한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주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고 지금도 젊은 남자랑 살고 있는 시쳇말로 사람들 사이에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모두가 상대도 하지 않는 여인을 만나주셨다. 그녀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먹이시려고 유대인들은 발도 디디지 않는 사마리아 땅을 일부러 가로질러 들어가셨다.

유대인들은 가까이 오면 부정하다고 돌을 던져 쫓아버리는 문둥병자를 그 얼굴에 손을 대고 고쳐주셨다. 하나님께 영원히 저주를 받아 구원 밖에 있다고 여기는 문둥병자 열 명을 한 번에 고쳐준 적도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마지막 날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에 로마 군병들이 당신에게 광대놀음을 시켰다. 유대인의 왕으로 분장시켜 홍포를 입히고선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는 등 온갖 조롱과 박해를 가했다. 그들에게도 참 빛을 비춰주셨다. 또 처형을 직접 도모한 음흉하고 사악한 대제사장 무리들마저 저들이 자기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당신이 죽기까지도 죄인들에 대한 긍휼을 거두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도피성으로 오신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다. 당신을 대적하는 죄인이 고의적 능동적으로 당신에게 범한 행위와 말과 심지어 마음속의 시기 질투 분노 증오까지 당신께선 단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리려 그런 것 때문에 죄인들을 더 애처롭고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은 어떤 사람의 외적인 조건과 상태로 그 사람의 질적 가치를 평가하는데 눈곱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일은 그분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사랑과 자비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여러분이 낳은 갓난아기는 아무리 울고 짜고 신경질 내어도 심지어 귀저기에 똥을 싸도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지 않는가?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자녀를 그와 동일한 사랑으로 붙들고 있다.

혹시 현재의 형편과 여건이 너무 고달파서 도무지 그런 사랑이라고 실감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소망을 키우며 끝까지 인내하라. 그럼 언젠가는 "나를 바로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게 하려고 주님이 그 동안에 그런 시련들을 허용했나보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 때가 반드시 온다.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십자가 죽음을 축하할 수 없지 않는가?

이번 주에 제 홈페이지에 어떤 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주셨다. 일리가 있는 질문이다. 제가 답변 드리기를 우선 성탄절을 축하하면서 그분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축하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또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주님도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럼에도 그분의 내면에는 이제 곧 죄인을 구원하는 길이 열린다는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성탄절을 축하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의미라고 답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간을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 알게 했다. 완전한 도피성을 이 땅에 건설하셨다. 당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당신도 영광을 받고, 신자 또한 그 영광에 동참시킨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이런 엄청난 기쁨으로 충만하셨던 주님이다.

성탄절을 축하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엄청난 구원을 기뻐하며 주님의 생일이 아닌 주님의 오심을 감사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과 말과 생각대로 일일이 처리했다면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님을 이미 알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 없다. 그분에게 생일은 없다. 돌아가신 기일도 없다. 어떻게 부르는가? 수난의 금요일일 뿐이다. 그리고 부활절만 분명히 있다. 처음과 끝이 없는 유일한 존재이시기에 그분만이 모든 인간에게 처음과 끝이 되는 유일한 분이다. 신자는 자신의 처음과 끝을 온전히 그분께만 의탁해야 한다. 그것만이 신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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