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1) 짧고 가벼운 환난
“우리가 겪고 있는 짧고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해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한다(고후 4:17).”
환난이 짧고 가볍다면, 영원한 행복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짧고 가벼운 환난은 게다가 영광의 크고 영원한 무게를 얻게 해는 바, 확실히 균형을 잡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광의 이 큰 무게와 비교할 때, 이것은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가장 참을성이 없는 자도 이것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난은 결코 짧고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난은 정말이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것이 이런 경우라면, 그때 이 말씀은 어색한 상황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짧고 가벼운 환난”이라는 사도의 말씀은 특별한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모든 인간의 고난 중에서 극단적인 것으로 시험받았던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한다. 저 본문 말씀도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시험을 받은 사람이 짧고 가벼운 환난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 짧고 가벼운 환난은 결코 짧고 가벼운 게 아니다.
우리는 가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속는다. 약 10분 정도의 고통도 참지 못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우리는 가끔 병원에서 이런 일을 본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들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저 ‘짧고 가벼운 환난’은 진짜 짧고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나는 믿음 안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런 영광의 크고 영원한 무게를 기대합니다. 나에게서 영원의 행복은 그것과 비교할 때 내가 온갖 종류의 고난의 30년 세월을 짧고 가벼운 환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유익입니다.”
보라, 이것이 사도의 말이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에 대한 김 빠진 수많은 찬사들을 듣는다. 그런 찬사들은 화려한 문구와 감상적인 서술로 우리의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도는 그런 것들에 대하여 모르나, 영원한 행복이란 말하는 자가 그런 고난이 짧고 가벼운 환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유익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영원한 행복에 대한 최고의 찬양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이란 고난의 30년의 세월을 짧고 가벼운 환난으로 만드는 그런 비교이다. 결국 비교한다는 것은 무게를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비교는 두 크기를 서로 멀리 떼어 놓고 있는 방식으로 무게를 다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이 비교는 두 크기를 매우 가깝게 가져온 결과, 영원한 행복의 현존은 이 환난에 대한 표현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행복에 대한 생각이 현존하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이 현존하기 때문에, 사도는 이렇게 환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왕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일반적으로 같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게 하지 않는가! 왕의 현존 앞에서, 사람은 평소에 자신을 짜증나게 하고 집에서 투덜거리게 했던 어떤 역경에 대하여 말한다.
“폐하, 이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애인 앞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같은 것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애인의 현존 앞에서,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다르게 말한다.
“자기야, 이것은 작은 문제에 불과해. 아무 것도 아니야. 걱정 마.”
이런 식으로 말을 바꾸는 것, 특별히 이런 식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 우리는 이것을 왕의 위엄에 대한 백성의 존경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애인과 관련해 사랑의 찬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최고의 것과 관련하여서는 엄숙함이라고 부른다. 혹은 이것은 일종의 공손함이다.
공손함은 누군가 현존하고 있고 현존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 우리가 이것에 깊이 생각할 때, 아, 고난당하는 우리는 얼마나 자주 무례했던가!
부드럽게 말해, 왕 앞에서 무례한 것처럼 영원한 행복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마치 영원한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척 하는 것, 마치 왕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척 하는 것, 이것은 얼마나 무례한가!
그때 영원한 행복은 지나치게 무겁다. 하늘의 궁중말로 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고난당하는 자는 영원한 행복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이해한다. 루터가 어느 곳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궁중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것이 먼저 훈련되어야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말할 수 있기 위해, 그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늘의 궁중말을 말할 수 있기 위해 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전에 언급했다시피, 영원한 행복의 영광에 대해 수다스럽게 쏟아내는 것은 공허하고 어리석은 말이다. 그러나 말하자면, 닫힌 입술로, 영원한 영광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인생의 환난에 대하여 다른 방법으로 말함으로써, 사람이 영원한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하늘의 궁중의 언어이다.
하늘의 궁중 언어로 말하는 것, 이것은 결국 태도의 문제다. 따라서 사도가 말한 것은 문자 그대로 맞는 말이다. 이런 우리의 환난은 짧고 가볍거나, 그때 70년의 세월은 정말로 영원하거나, 영원과 비교할 때 정말로 짧은 시간이다!
큰 무게가 환난을 가볍게 하는 한에서만 환난이 가벼울지라도, 사람이 영광의 큰 무게의 기대를 지고 간다면, 환난은 틀림없이 가볍지 않겠는가! 환난이 가볍지 않다면, 가장 무거운 고난이 영광의 영원한 무게와 비교할 때 도대체 얼마나 무게가 나가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폐위된 왕이 도망칠 때, 그를 따라가는 신하들은 얼마나 고귀하게 충성스러운가! 그의 제국의 위엄이 누더기로 옷을 입을 때, 한 때 궁전 앞에서 “당신의 위엄이어(폐하, Your Majesty)!”라고 말했던 것처럼, 동일한 복종과 존경으로 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신하는 얼마나 고귀하게 충성스러운가!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난당할 때에도 언어를 바꾸지 않는 것, 언제나 하늘의 궁중 언어로 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충성이다. 충성은 언어를 바꾸지 않는다. 반역자는 고난의 때에 언어부터 바꾼다.
왕이 도망칠 때 ‘폐하’라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은 고난당할 때에 언어를 바꾸지 않는다. 고상한 하늘의 궁중의 언어를 배우자!
여기에 차이가 있다. 신하가 변한다면, 그것은 왕을 슬프게 할 것이다. 그는 왕의 반역자니까.
하지만 고난당하는 자가 언어를 바꾼다고 해서 영원의 행복의 반역자가 된다고 착각하지 말라. 사람이 믿음과 영원한 행복과 단절할 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역자가 될 뿐이니까.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